강제성 없고 예외조항 많아… 정권 입맛따라 ‘고무줄 준칙’ 우려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0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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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허울뿐인 재정준칙’ 논란

5일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한국형 재정준칙’ 도입 관련 브리핑을 마친 뒤 단상에서 걸어 나오고 있다. 뉴스1
5일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한국형 재정준칙’ 도입 관련 브리핑을 마친 뒤 단상에서 걸어 나오고 있다. 뉴스1
상당수 국가가 운용 중인 ‘재정준칙’을 정부가 뒤늦게나마 도입하는 것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나랏빚과 재정 적자의 위험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다.

하지만 재정준칙으로 명시한 국가채무 비율 등의 기준을 정부가 필요에 따라 손쉽게 바꿀 수 있도록 해 실효성이 떨어지는 ‘맹탕 준칙’, ‘고무줄 준칙’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그나마 이번 재정준칙 적용 시기를 5년 뒤로 미뤄 현 정부는 재정준칙을 지킬 필요가 없게 됐다.

○ 재정 마지노선 ‘국가채무 40%’ 공식 폐기

정부가 5일 발표한 ‘한국형 재정준칙’의 핵심은 2025년부터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을 60%, 통합재정수지 적자 비율을 3% 이내로 관리한다는 것이다.


2020∼2024년 국가재정운용계획에 따르면 국가채무 비율은 내년 46.7%에서 2024년 58.3%로 오르는데 이 수준을 가급적 유지하겠다는 방침이다. 통합재정수지 적자 비율 3% 역시 2024년 전망치(3.9%)를 감안해 설정했다.

정부는 “두 기준은 국제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일치하는 수준”이라고 했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국가채무 비율을 재정준칙 기준으로 삼은 나라는 63개국이며, 이 중 프랑스 독일 스페인 영국 등 40개국이 국가채무 비율 60%를 상한선으로 두고 있다.

이로써 한국도 그동안 ‘재정 마지노선’으로 여겨졌던 국가채무 비율 40%가 공식 폐기된 셈이다. 지난해 5월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에게 “40%의 근거가 무엇이냐”고 지적한 바 있다.

정부가 재정준칙 시행 시기를 2025년으로 잡은 것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응과 복지 지출 등으로 재정 지출이 급격히 늘어난 상황을 반영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홍 경제부총리는 이날 브리핑에서 “(코로나19 대응 등으로) 재정이 가장 악화한 다음 해부터 재정준칙을 적용하는 게 적절하지 않아 5년 정도 유예기간을 뒀다”고 했다.

○ 강제성 없는 고무줄 규정

하지만 재정준칙 자체가 강제성이 없고 정권 입맛에 따라 언제든지 재정을 펑펑 쓸 수 있도록 퇴로를 열어둬 ‘무늬만 준칙’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가령 2025년 대규모 감염병 사태가 재발해 국가채무 비율이 65%로 올라가더라도 그 다음 정부인 2029년까지만 이 비율을 60%로 복원시키면 되도록 했다. 당해 정부에선 사실상 재정건전성 유지 부담이 크지 않은 것이다.


또 경제성장률이 둔화하거나 고용이 부진할 때도 예외가 적용돼 통합재정수지 적자 비율 기준을 최장 3년간 3%에서 4%로 완화할 수 있다. 그런데 경제위기나 경기 둔화를 어떻게 판단할지 명확한 기준이 없다.

무엇보다 국가채무 비율 60%, 통합수지 적자 비율 3% 등 재정준칙의 구체적 수치를 헌법이나 법률이 아닌 시행령으로 정해 5년마다 변경이 가능하도록 한 것이 가장 큰 문제로 꼽힌다. 정치권의 입김이나 정권의 필요에 따라 포퓰리즘적 재정 투입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시행령 개정만으로 수치를 고무줄처럼 늘렸다 줄였다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신규 채무는 GDP 대비 0.35% 이내로 제한한다’고 헌법에 명시한 독일이나 ‘재정수지 적자를 GDP의 0.5% 이내로 관리한다’고 법률로 규정한 프랑스 등과 대비된다.

강성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정부가 발표한 재정준칙이 유명무실해 준칙을 지키더라도 재정건전성 악화를 막기 어려운 수준”이라며 “형식뿐인 재정준칙과 별도로 정부와 국회가 나랏빚을 줄이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세종=송충현 balgun@donga.com·남건우 기자
#재정준칙#국가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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