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들 대출 조건으로 가입 종용… 국책은행 산업-기업銀 비중 최다
정부 ‘꺾기’ 금지에도 편법 관행… 수익률 1%대… 기업 울며겨자먹기
약 3년 전 자동차부품업체 A사는 공장을 이전하려고 KDB산업은행에서 시설자금 및 운영자금대출 300억 원을 받았다. 산은 대출 담당자는 “대출을 해줄 테니 퇴직연금 계좌를 산은으로 옮기라”고 요구했다. A사 관계자는 “요구를 거절할 수 없어 시중은행 2곳에 가입해 있던 퇴직연금 계좌 중 하나를 산은으로 옮겼고, 일부 직원의 급여통장도 산은으로 바꿨다”며 씁쓸해했다.
금융회사들이 기업들에 대출을 해주면서 자사의 퇴직연금 상품에 가입하라고 요구하는 ‘끼워 팔기’ 관행이 여전한 것으로 드러났다.
1일 최운열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따르면 국내 시중은행과 특수은행, 지방은행 등 은행 13곳에 퇴직연금을 가입한 기업 31만3622곳 중 절반에 해당하는 51%(16만22곳)가 해당 은행으로부터 대출과 출자를 받은 기업인 것으로 드러났다. 최 의원실은 가입 기업 중 상당수가 은행에서 금융지원을 받는 대가로 퇴직연금에 가입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분석했다.
특히 국책은행인 산은과 IBK기업은행에서 이런 비율이 높았다. 두 은행에서 퇴직연금에 가입한 기업 중 대출과 출자를 받은 곳의 비중은 각각 69.1%(1417곳)와 68.8%(6만3073곳)였다. 13개 은행 중 가장 높은 수치다. 가입 금액 기준으로 보면 산은은 대출 및 출자를 받은 기업의 비중이 전체의 82.0%(3조7242억 원), 기은은 71.5%(7조7968억 원)나 됐다. 중소기업이나 자금난을 겪고 있는 기업들에 대출을 많이 해주는 국책은행들이 끼워 팔기를 가장 많이 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 밖에 대출과 출자를 받은 기업 수 기준으로 신한은행(57.8%)과 하나은행(52.5%)이 평균치를 넘어섰다.
금융당국은 은행들이 기업에 대출을 해주는 조건으로 대출 실행일 전후 1개월 이내에 대출액의 1%를 초과하는 규모로 퇴직연금에 가입하도록 하는 행위(일명 ‘꺾기’)를 금지하고 있다. 하지만 금융권에서는 가입 시기나 금액 등을 조정해 편법으로 자사 상품을 끼워 파는 관행이 여전하다.
2005년 12월 제도가 도입된 이후 퇴직연금 시장 규모는 147조 원(지난해 말 현재)으로 급성장했다. 하지만 수익률은 매우 저조하다. 지난해 말 기준 은행 13곳의 퇴직연금 수익률은 △확정급여형(DB형·기업이 퇴직금을 통째로 맡기는 방식)이 1.25∼2.01% △확정기여형(DC형·근로자가 은행에 돈을 직접 적립해 운용하는 방식)이 1.41∼2.10%였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감안하면 사실상 ‘제로 금리’인 셈이다. 연금 대부분을 예금이나 채권 등 원금 손실 가능성이 낮은 상품으로 운용하다 보니 수익률이 10%대에 이르는 미국과 호주 등 선진국에 비해 낮은 것이다. 특히 퇴직연금 가입 기업 수가 가장 많은 기은은 DB형 수익률이 1.27%, 산은은 DC형 수익률이 1.43%로 13곳 중 끝에서 두 번째 수준이었다.
최 의원은 “국책은행들은 수익률이 낮은데도 정책금융에 목마른 기업들에 대출을 해주는 대가로 퇴직연금 운용 사업을 유치하고 있다”며 “국책은행의 퇴직연금 사업 방식 전반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