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붙은 일자리… “월급 낮춰도 갈곳이 없어”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2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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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고용절벽 온다]<上> 비상등 켜진 ‘고용 버팀목’

 서울 시내의 한 음식점에서 10년 넘게 일해 온 50대 여성 A 씨는 최근 “그만 나오라”는 통보를 받았다. 청탁금지법 시행으로 연말 특수가 사라지면서 주인이 종업원 감축에 나선 것이다. 사람을 뽑겠다는 음식점도 거의 없어 당분간 실업자로 지내야 한다. A 씨는 “최저임금만 받았지만 아들 학자금에 큰 보탬이 됐었다”며 “고용보험에도 가입하지 못했고 실업급여 타는 법도 모른다. 막막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제조업, 건설업과 음식·주점업은 한국의 노동시장을 떠받쳐온 주축이다. 대기업들이 공장을 속속 해외로 이전하는 상황에서도 조선과 건설 경기의 호황이 이어졌고, 노동시장에 유입되는 여성과 중장년을 음식업 등 서비스업이 대거 흡수해온 것. 청년실업이 심각한데도 전체 고용률이 증가해온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노동시장 ‘3대 업종’의 일자리 여건이 급속히 악화됨에 따라 일각에선 계층 간 갈등 심화와 사회 불안까지 우려하고 있다. 강력한 대응책이 빠르게 추진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 3대 업종 너마저…


 “일단 다른 기술을 배우거나 공부를 하면서 기다려 보시죠.”

 이달 초 전남 영암의 ‘조선업희망센터’(정부가 설치한 조선업 실직자 재취업 알선 기관)를 찾은 40대 남성 B 씨는 담당자에게서 이런 말만 듣고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B 씨는 현대삼호중공업 2차 협력업체에서 일하다가 해고됐다. 월급이 줄더라도 조선소 협력업체면 어디서든 일할 생각이었지만 일자리 자체가 없었다. 희망센터 측은 직업훈련을 제안하며 다른 업종 취업을 권유했다. 배 만드는 일만 해온 B 씨에겐 ‘고시’를 보라는 얘기로 들렸다.

 고용노동부가 올해 노동시장을 종합적으로 분석한 결과 A, B 씨처럼 ‘3대 업종’에서도 해고되는 사람이 크게 늘어나면서 ‘일자리 절벽’이 닥친 것으로 나타났다. 장기화된 저(低)성장과 구조조정, 청탁금지법 시행으로 우려했던 일자리 낭떠러지가 대통령 탄핵 정국과 맞물려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최순실 게이트로 국정까지 마비되면서 뾰족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사이 일자리 절벽의 ‘높이’는 치솟고 ‘속도’는 올라가고 있다.

 10월 사업체노동력조사에서 음식·주점업 종사자는 지난해 같은 달보다 3만 명이나 감소했고 조선업이 포함된 ‘기타운송장비 제조업’도 2만8000명 감소하며 2015년 12월 이후 11개월 연속 감소세를 이어갔다. 이 업종들은 노동시장에 새로 유입되는 여성(음식업)과 중장년층(조선업) 일자리를 대거 창출해 왔다는 점에서 충격은 더 클 수밖에 없다.

 특히 반도체, 휴대전화가 포함돼 고용 규모가 가장 큰 통신장비 제조업 종사자 수는 28개월 연속 줄어 우려가 커지고 있다. ‘중국산 공습’을 견디다 못한 업체들이 공장을 해외로 속속 이전하고 있어서다. 양질의 일자리로 평가받는 금융업도 17개월 연속 감소했다. 만성 인력 과잉에 따른 상시 구조조정에 핀테크(정보기술이 결합된 금융 서비스)까지 활성화되면서 일자리가 대폭 줄고 있는 것이다. 양현수 고용부 노동시장분석과장은 “조선업은 다소 진정 국면이지만 철강업도 건설경기 침체에 따라 나빠질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했다.


○ 엎친 데 덮친 위기의 노동시장


 더 큰 문제는 박근혜 정부에서 그나마 호황을 유지해오던 건설업까지 향후 전망이 좋지 않다는 점이다. 건설업계에 따르면 9월 기준 건설 수주량은 지난해 같은 달보다 38.6%나 감소했다. 민간 부문 수주량이 48.7%나 감소한 탓이다. 건설 수주량은 미래 경기를 나타내는 선행지표로 향후 경기 축소 우려가 크다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건설업이 국내 고용시장에 크게 기여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향후 이 업종의 실업자가 대거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특히 기획재정부의 국가재정운용계획에 따르면 사회간접자본(SOC) 투자는 2020년까지 연평균 6.0%씩 감소할 예정이다. 국가 예산이 투입되는 대규모 토목공사가 대거 줄어든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삼성 포스코 대우 한화 등 주요 건설사들은 이미 선제적으로 구조조정에 나섰거나 계획 중(현대 대림 GS SK 등)이다. 여기에 대통령 탄핵 여부와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출범 및 기준금리 인상 등의 불확실성이 해소되지 않는다면 일자리 절벽 시점은 더 빨라질 것으로 전망된다.

 16년 만에 최고치(3.9%)가 될 것으로 보이는 내년 실업률과 경제성장률도 주요 변수다. 한국은행은 내년 성장률을 2.8%로 내다보고 있다. 이런 점을 근거로 한국노동연구원은 내년 취업자 증가 폭이 28만4000명으로 올해(29만6000명)에 이어 2년 연속 20만 명대에 머물 것으로 예측했다. 하지만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내놓은 전망치(2.4%)까지 성장률이 떨어진다면 취업자 수 증가 폭 역시 더 줄어들 수 있다.

 특히 경제성장 기여도가 큰 건설업 경기마저 침체 흐름이 이어지면 국내 노동시장은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고용부 고위 관계자는 “대통령 탄핵과 같은 불확실성이 빨리 해소되지 않는다면 내년 초부터 취업자 수 증가 폭이 올해보다 더 감소할 수 있다”며 “여야정 협의체를 하루빨리 가동하고, 일자리 문제를 최우선적으로 논의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유성열 기자 ryu@donga.com
#고용 버팀목#음식#제조#건설업#청탁금지법#구조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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