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현 교수의 디자인 읽기]식품 포장에 사용한 제품 사진의 파격

  • 입력 2009년 9월 19일 03시 03분


사진을 둘러싼 배경 색과 시리얼 사진을 가리지 않도록 글자를 배치한 세심함이 보이는 테스코와 켈로그의 제품들. 또 다른 작위일 수도 있지만 소비자들은 오히려 자연스러움으로 이해하는 ‘그로브 프레시’의 유기농 사과주스 포장. 사진 제공 지상현 교수
사진을 둘러싼 배경 색과 시리얼 사진을 가리지 않도록 글자를 배치한 세심함이 보이는 테스코와 켈로그의 제품들. 또 다른 작위일 수도 있지만 소비자들은 오히려 자연스러움으로 이해하는 ‘그로브 프레시’의 유기농 사과주스 포장. 사진 제공 지상현 교수
벌레먹은 자국 살려 ‘친환경’ 생생하게

아침식사로 시리얼을 애용하는 주부들은 아이들의 짧은 입맛 때문에 새로운 제품을 계속 시도해 봐야 한다. 그러나 포장된 시리얼은 다른 식품처럼 미리 먹거나 냄새를 맡아 보고 고를 수가 없다. 상자 측면에 인쇄된 성분을 살펴보기도 하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판단 재료는 앞면에 인쇄된 제품 사진이다. 신선한 우유에 반쯤 잠겨 있는 시리얼의 질감과 색깔을 통해 아이들의 입맛에 맞을까를 추측하는 것이다.

그러니 시리얼 업체들은 가급적 맛깔스럽게 사진을 찍어 포장 전면의 잘 보이는 곳에 크게 넣는다. 그런데 이 간단한 ‘요령 부리기’에서도 잘나가는 기업과 그렇지 않은 기업은 차이가 난다. 매장에 전시된 여러 제품을 둘러보면 두 요소가 눈에 들어온다. 하나는 사진을 둘러싼 면의 배색이고 다른 하나는 사진과 글자의 조합 방식이다.

색채는 같은 제품도 더 신선하고 맛있어 보이게 할 수 있다. 예컨대 스팸캔의 디자인과 같이 붉은 햄 사진의 둘레를 청색으로 하면 보색대비에 의해 햄이 실제보다 더 붉게 보여 신선하게 느껴진다. 주황색과 노란색은 미각을 자극하는 대표적인 색채다. 특히 적당한 사진과 조합될 경우 단맛이나 고소한 맛을 강조할 수 있다. 그래서 시리얼 포장에는 이런 배색이 자주 사용된다. 참고로, 핑크와 인디언핑크색은 화장품과 같은 향과 맛을 연상시켜 식품에 쓰일 경우 선호층이 극단으로 갈릴 수 있고, 연두색이나 노란색은 신맛을 전달하는 데 유리하다. 이는 많은 색채학 교과서에 소개돼 있는 유명한 얘기들이다.

잘나가는 브랜드들이 엄격히 지키는 것은 맛깔스럽게 보이도록 온갖 연출을 다해 찍은 제품 사진을 글자 등 그래픽 요소들로 가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맛있게 보이도록 찍은 사진은 고객을 유혹하는 미인의 얼굴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정작 사진은 정성 들여 찍어 놓고 그 위에 덕지덕지 여러 글자를 얹어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게 해놓는 브랜드도 적지 않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디자이너가 포장 디자인의 심미적인 면만 고려했기 때문이다. 제품 사진을 넣어 소비자의 미각을 자극한다는 공감각적 의도를 잊은 채 글자와 여러 그래픽 요소의 조화로운 배치에만 신경을 집중한 결과다. ‘팔리는 디자인’과 ‘세련된 디자인’이 갈리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식품 포장 디자인에서 들어가는 제품 사진도 변화하고 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사진은 제품을 가급적 신선하고 맛있게 보이도록 연출해 찍었다. 온갖 아이디어를 끄집어내 촉촉하고 매끄러운 과일이나 육즙을 가득 머금은 고기 사진을 연출하고 카메라에 담아 왔다.

그러나 근래 들어 자연 그대로의 사진을 찍어 포장디자인에 사용하는 기업이 늘고 있다. 예컨대 과일의 한 부분이 조금 탈색되거나 껍질에 난 상처, 벌레 먹은 자국 등이 그대로 보이고 바구니에 자연스럽게 담긴 모습을 찍어 포장디자인이나 인쇄물에 사용하는 것이다. 사진의 초점 깊이도 늘려 찍어 식품이 특별히 강조되지 않고 다른 배경 요소들과 고만고만하게 나오는 경우가 많다.

이런 스타일의 사진이 포장에 처음 등장할 때에는 환경 문제에 관심이 커지면서 나타난 일시적 유행 정도로 치부됐다. 그러나 소비자들의 반응은 그렇지 않았다. 소비자들은 이런 사진이 들어간 식품을 농약 없이 친환경적으로 재배한 고급 식품으로 생각하는 한편 사진 자체도 작위가 없는 리얼리즘으로 높이 평가했다. 소비자들의 안목이 예상 외로 높았던 것이다.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에서 사진의 중요성은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다. 사진만큼 우리의 공감을 이끌어내고 리얼리티를 생생하게 전달하는 방법은 아직 없다. 그러나 리얼리티를 평면적으로 담기만 하는 게 아니다. 그 안에는 다양한 스타일이 있고 사진이 완성된 뒤 다시 한 번 다양한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다. 이 일은 모두 사진가가 아닌 디자이너의 몫이다. 특정한 스타일, 각도, 조명 효과를 사진가에게 주문하는 일에서부터 완성된 사진을 어떤 크기로 어디에 배치할 것인가 역시 디자이너의 손에 달려 있다. 디자이너가 관리자 혹은 연출가로서의 역량을 갖춰야 하는 이유 중 하나가 이런 데 있다.

지상현 한성대 교수·미디어디자인콘텐츠학부 psyjee@hansu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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