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최영해]‘정치 안개’에 투자꺼리는 기업들

  • 입력 2005년 10월 18일 03시 08분


코멘트
“불황일 때 공격적인 경영을 하는 게 우리 그룹의 전통적인 경영 원칙입니다. 그런데 요즘 같은 분위기라면 솔직히 투자를 확대할 엄두가 안 납니다.”

삼성그룹의 한 임원은 16일 “내년 사업계획을 어떻게 짤 것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한숨을 쉬며 이같이 대답했다.

삼성이 내년 투자를 얼마나 할지는 큰 관심 사항이다. 반도체, 액정표시장치(LCD), 통신 분야에서 투자를 계속 늘려야 ‘마켓 리더(시장 선도자)’의 위치를 굳힐 수 있다.

하지만 사업계획 작성 작업은 예년보다 더디기만 하다. 내놓고 말은 못하지만 정치권과 일부 시민단체의 ‘삼성 때리기’가 도를 넘어섰다는 내부 불만도 적지 않다.

사정은 조금씩 다르지만 LG 현대·기아자동차 SK 등 다른 주요 대기업도 내년 사업계획을 짜는 과정에서 불안감을 느끼기는 마찬가지다.

유가 환율 금리 등 기업을 둘러싼 경제 환경 중 어느 하나도 만만한 게 없다. 하지만 재계가 요즘 느끼는 불안의 본질은 ‘경제 변수’가 아니라 ‘정치 사회 변수’다.

“한국 기업이 글로벌 경제 전쟁에서 이기는 것은 고사하고 살아남는 것만도 쉽지 않습니다. 도와줘도 시원찮을 판에 기업을 옥죄는 법안이 여의도(국회)에 수북이 쌓여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사석에서 만나는 경제단체나 대기업 관계자들은 이런 불만을 털어놓는다. 대통령이 경제에 관심이 많다고 하지만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보면 역시 경제보다는 정치에 훨씬 관심이 많아 보인다는 말도 나온다.

한 대기업 임원은 “내년 지방선거를 전후해 벌어질 일을 생각하면 끔찍하다”고 토로했다. 표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정치권의 생리에 비춰 보면 기업에 불어 닥칠 ‘외풍(外風)’이 간단치 않을 것이라는 걱정이었다.

물론 대기업들도 반성해야 할 일이 적지 않다. 특히 경영권 승계와 관련해 절세(節稅)의 수단으로 편법을 사용한 것이 부메랑으로 돌아와 소탐대실(小貪大失)하는 어리석음을 더는 범해선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재계가 내년 사업계획조차 제대로 짜지 못하는 현실이라면 간단치 않다. “외부 환경이 안개 속”이라는 기업인들의 목소리를 엄살로만 치부해선 안 될 상황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최영해 경제부 yhchoi65@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