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박중현]‘정부 지원’마저 불안한 기업들

  • 입력 2004년 11월 17일 19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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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 피하려다 호랑이 만나는 것 아니냐는 게 대기업 총수들의 솔직한 심정일 겁니다.”

이헌재(李憲宰) 경제부총리가 연기금을 외국 자본에 대한 국내 기업의 경영권 방어용으로 투입하는 방안을 제시한 것에 대해 한 대기업 임원은 이렇게 말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경영권 위협을 걱정하는 대기업들은 정부가 외국 자본으로부터 기업 경영권을 지켜 주겠다면 환영하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재계의 반응은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 대기업을 ‘개혁의 대상’으로 보는 정부가 상당한 ‘입김’을 미칠 수 있는 연기금이 기업 지분을 가졌을 때 외자 못지않게 경영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의구심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 부총리가 다른 ‘불순한 의도’를 갖고 연기금 관련 발언을 했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상황을 곱씹어 보면 기업들의 뿌리 깊은 정부 불신을 탓할 수만도 없다.

재계가 “금융계열사 의결권 제한을 더 강화하면 경영권이 외국 자본에 넘어갈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일 때마다 정부는 “대기업들이 위협을 과장한다”고 일축해 왔다. 그런데 갑자기 연기금까지 동원해 경영권을 방어해 준다는 것은 좀 앞뒤가 맞지 않는다. 9월 말 러시아에서 한국 기업의 활약상을 보고 “기업이 곧 국가”라고 말했던 대통령은 두 달이 채 안 돼 “호황을 누리는 대기업들이 경제 위기를 말한다”고 해 기업을 당황스럽게 했다.

상당수 경제 전문가들은 정부 여당이 추진 중인 공정거래법 개정안이 기업의 경영권 방어를 더 어렵게 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관계자는 기자에게 “아무리 고민을 털어놔도 과장 내지는 엄살로만 받아들이는 것 같아 서글픈 생각마저 든다”고 했다.

외국 자본의 ‘대항마’로 연기금을 활용하는 것은 고려해 볼 가치가 있는 일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정부가 기업에 ‘호랑이’로 인식되는 상황에서는 오히려 기업인의 불안감만 가중시킬 가능성이 높다. 정부는 연기금 활용 확대를 말하기에 앞서 ‘오락가락하는 기업관’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기업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존중한다는 확신을 기업인들에게 심어 주어야 한다.

박중현 경제부기자 sanju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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