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콩트]복거일/어떤 삼대(三代)

  • 입력 2003년 12월 31일 17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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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를 펴고 어깨를 두드리면서, 이신득씨는 막 옮긴 단락을 훑어보았다.

“칼라하리 사막에 사는 사냥꾼-채취자 종족인 쿵족의 어린애들은 미국과 유럽의 어린애들과는 아주 다른 조건 속에서 양육된다. 그러나 그들의 미소는 미국과 유럽의 어린애들의 미소와 동일하고, 같은 시기에 나타나고, 같은 사회적 기능을 수행한다. 미소는 귀먹고 눈먼 아이들에게도, 심지어 귀먹고 눈멀었을 뿐 아니라 불구가 심해서 자신들의 얼굴을 만질 수도 없는 탈리도마이드 때문에 불구가 된 아이들에게도, 때맞춰 나타난다.”

‘콩콩콩…’ 위층에서 뛰어가는 소리가 났다.

‘정현이 녀석이 또 시작했구나.’ 속으로 뇌고서, 그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위층엔 지난 봄에 젊은 부부가 들어왔는데, 막 두 살 난 사내 아이가 종일 뛰어다녔다. 밤 한 시 넘어서까지 뛰어다니는 날도 많았다. 마음 속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그 소리를 애써 밀어내면서, 그는 일을 계속했다. 원고를 넘기겠다고 출판사에 약속한 날짜가 코앞에 다가온 터였다.

‘쿵’ 하는 소리에 놀라서, 그는 손길을 멈추었다. 녀석이 무엇을 바닥에 내던진 모양이었다. 억지로 눌러 넣었던 화가 솟구쳤다. 갑작스러운 소리는 위험을 뜻했고, 오랜 진화를 통해서 다듬어진 그의 몸은 그의 의식보다 먼저 위험에 반응해서 복잡한 생리적 과정들을 진행시키고 있었다. 그런 반응은 물론 몸을 축냈다. 위층 꼬마 녀석이 지난 한 해 동안 아래층 사람들의 건강을 적잖이 해친 셈이었다.

참다 참다 안 되겠다 싶어서, 녀석 부모에게 얘기한 적이 스무 번은 넘을 터였다. 그러나 부모는 아이가 말을 듣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이 아파트가 바닥이 유난히 얇은 것 같아요” 하고 아파트 탓을 했다.

어느 사이엔가 그의 화는 무능한 자신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좋은 주택이나 아파트에 살면, 이런 일은 없을 터였다. 큰딸 혼사를 치르느라, 작년 봄에 한강변의 아파트를 팔고 이곳의 허름한 아파트를 구해서 나온 터였다. ‘오륙도’니 ‘사오정’이니 하다가 요사이엔 ‘삼팔선’이니 ‘이태백’이니 하는 세상에서, 환갑이 내일 모레인 그가 다시 직장을 얻어 좋은 집에서 살 가망은 없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밖을 내다보았다. 겨울답지 않게 포근한 날씨였다. 그는 일어나서 거실로 나왔다. “여보, 일찍 갔다 오지.”

설거지를 마치고 손에 로션을 바르던 그의 아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콩콩콩….’ 옷을 갈아입고 현관으로 나오는데, 위에서 다시 뛰는 소리가 났다. 그의 아내가 그를 흘긋 보면서 딱하다는 웃음을 띠었다.

“내가 너그러운 이웃인가 아니면…?”

“평균적인 이웃입니다, 이신득씨.”

“그래?”

“너그러운 사람은 그냥 참고 살 거고, 따지는 사람은 벌써 여러 번 싸움을 했을 거고.”

“내가 자주 올라가는 건….” 그는 설명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아이가 너무 소란을 피운다는 것을 부모에게 알려주려고 올라간 것만은 아니었다. 녀석을 여러 번 만나다 보니, 정 같은 것이 들었는지, 가끔 녀석이 보고 싶기도 했다. 콩콩콩 뛰어다니는 소리가 나면, 뛰어다니는 아이의 모습이 떠오르게 되었고, 시끄러움도 좀 견딜 만해지는 듯했다.

“정현이는 좀….”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종일 저렇게 뛰는 것도 그렇지만, 아이가 웃지를 않아. 그동안 한번도 웃는 걸 못 봤어. 낯을 가리는 것도 아니고.”

그의 아내가 문을 열었다. “햇살이… 날씨가 참 좋네.”

“여보, 정현이 공원에 데려가 볼까? 종일 집안에 있으면, 밤에 더 뛸 거 아냐?”

“그러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이 날씨에 무슨 감기?” 그는 신을 신은 채 엉금엉금 기어서 탁자에 놓인 바나나를 집어 들었다.

위층 여자는 미안한 낯빛으로 그를 맞았다. “죄송해요, 아저씨.”

아이는 표정이 없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가 바나나를 내밀었어도, 녀석은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로 말없이 받아 들었다.

“정현아, ‘고맙습니다, 할아버지’ 하고 인사해야지.”

녀석은 그저 손에 든 바나나만 골똘히 내려다보았다.

“할아버지가 껍질을 벗겨 줄게.” 그는 바나나 하나를 떼어 내어 껍질을 벗겨서 녀석에게 주었다.

녀석은 성큼 한입 베 물더니 오물오물 입을 놀렸다.

“정현이 데리고 저기 생활 공원에 갔다 올게요. 날씨도 좋은데, 한창 자라나는 아이를 종일 집안에 가두어 두는 게….”

“아유, 괜찮습니다. 어떻게….”

“안식구랑 산책 나가는데….” 그는 바나나 먹는 데 정신이 팔린 녀석을 안아 들었다. 녀석은 신통하게도 낯을 가리지 않았다.

“어쩌나… 지금 손님이 와서, 제가 나갈 수가 없는데요.” 여자가 난감한 얼굴을 했다.

“괜찮아요. 공원을 한바퀴 돌고 돌아올게요.”

공원으로 가는 길은 가팔랐지만, 녀석은 곧잘 걸었다. 열심히 바나나를 먹어 가면서. 공원에 이르자, 그와 그의 아내는 녀석과 함께 한바퀴 돌았다. 그리고 자판기에서 음료수 캔을 하나 뽑아서 녀석에게 건넸다. 녀석은 이내 마시는 데 열중했다. 겨우 두 살 난 아이가 말도 표정도 없이 한 가지 일에 열중하는 모습이 그의 마음에 묘한 그늘을 던졌다. 아이가 정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조금 더 짙어졌다.

녀석이 갑자기 외마디 소리를 냈다. 꼭 작은 짐승의 소리 같았다.

녀석의 눈길을 따라가니, 녀석의 엄마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아주 뚱뚱한 여자였다. 가파른 산길을 올라오느라, 숨이 찼고 땀을 흘렸다.

“정현아.” 엄마가 부르자, 녀석은 다시 외마디 소리를 내고는 부리나케 달려갔다.

“참 좋네요. 이런 데가 있는 줄 몰랐어요.” 그들이 다가가자, 그녀가 말했다.

“산책엔 아주 좋아요.” 그의 아내가 받았다.

“정현이 데리고 가끔 나오세요. 아이는 햇볕을 받아야 돼요.” 하마터면 그는 덧붙일 뻔했다. ‘그러면 아주머니도 살이 좀 빠질 테고요.’

녀석을 제 엄마에게 맡기고, 그와 그의 아내는 산등성이를 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걸음은 여느 때보다 탄력이 있었고 마음도 밝았다. 봄날처럼 좋은 날씨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 이십 분 뒤, 그들이 공원에 돌아왔을 때, 녀석과 엄마는 아직 거기 있었다. 엄마가 먼저 그들을 보고서 웃음을 지었다. 만난 뒤 처음으로 그녀의 모습엔 여유가 있었다.

그들이 가까이 다가갔을 때에야, 녀석은 그들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잠시 표정 없는 얼굴로 그들이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녀석이 갑자기 외마디 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그에게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를 알아본 것이었다.

따스한 무엇이 가슴을 가득 채우는 것을 느끼면서,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녀석이 넘어질까 걱정하면서, 쪼그리고 앉아 두 팔을 벌렸다.

그의 품 안으로 달려들기 전, 녀석은 다시 작은 짐승처럼 외마디 소리를 지르더니 문득 환한 웃음을 지었다.

그는 녀석을 안고 일어섰다. 그리고 녀석의 얼굴에 볼을 비볐다. 녀석의 젖내가 오래 잊혀졌던 기억들을 불러냈다. 딸들을 키울 때 느꼈던 자랑과 즐거움이 가슴을 채웠다.

그의 아내와 아이의 엄마는 웃음 띤 얼굴들로 그와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여인이 모녀 같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가난과 걱정으로 찌든 여인이 어쩐지 젊어 보이고, 살이 너무 찐 여인이 어쩐지 맵시가 있었다.

그의 팔에 안긴 녀석이 다시 외마디 소리를 지르더니 까르르 웃었다.

▼저자약력 ▼

△1946년 충남 아산 출생

△1967년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1987년 소설 ‘비명(碑銘)을 찾아서’로 데뷔

△대표적 작품 및 저서 ‘높은 땅 낮은 이야기’(1988년)

‘이것이 시장경제다'(1998년)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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