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포석 人事의 세계]기업 ⑪-경제부처 관료출신

  • 입력 2003년 8월 24일 18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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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벤처 열풍 등으로 빈번했던 자리 이동의 흐름은 경제 부처도 비켜가지 않았다. 2000년 한 해만도 재정경제부 금융감독위원회 산업자원부 정보통신부 등 각 경제부처에서 잘 나가던 서기관 사무관 등 30명 이상이 공직을 떠났다. 과거 승진이 어려워진 고위직 공무원들에게 자리를 하나씩 ‘배려’해 주던 것과 달리 ‘자기 발로 걸어 나간’ 점이 눈길을 끌었다.

재정경제부 관료 출신인 GE인터내셔널 이현승 상무. 미국 하버드대 로스쿨과 케네디스쿨을 마치고 재경부에 복귀한 그는 행정고시 동기 중 가장 먼저 서기관으로 승진한 촉망받던 관료였다. 하지만 2001년 놀라워하는 선후배들을 뒤로 한 채 13년 공직 생활을 접었다.

그는 미국계 투자은행인 메릴린치에서 일한 뒤 지금은 제너럴 일렉트릭(GE)의 한국투자 총책임자로 있다. 그는 공직에서 민간 부문으로 ‘소프트 랜딩’한 비결로 ‘어깨 힘 빼는 것’과 ‘확실한 고객 지향성’을 꼽았다.

“2년8개월 동안 재경부 장관 비서로 4명의 장관을 모시면서 우리나라 구조조정의 생생한 현장을 목격하고 공부도 많이 했죠. 그때 이 쪽 분야 일을 해보고 싶었어요. 특히 어깨 힘을 많이 빼면서 ‘재경부 출신인데 다르네’라는 소리를 들은 것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주우식 삼성전자 투자홍보 담당 상무, 우병익 KDB론스타 대표, 김범석 동원BNP투신운용 대표, 이상묵 삼성금융연구소 상무, 조창현 레마코 대표, 이형승 브이소사이어티 대표 등도 비슷한 시기에 재경부나 금감위를 떠난 경제관료 출신이다.

이 가운데 우병익 대표도 공직에서 민간분야로 옮겨 성공했다는 평을 듣는다. 2000년 5월 재경부 요직 과장인 은행제도과장 때 재경부를 떠난 그는 이제 구조조정 전문가로 거듭났다.

가족과 동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가 결단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새로운 분야에 대한 호기심과 ‘금융통’으로 일하면서 얻은 ‘구조조정 분야는 한번 해볼 만하다’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그는 서통의 필름사업부문, 모닝글로리, 동양철강 등 부실회사 3개사를 인수해 경영을 정상화시켰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1년까지 재경부와 금감위를 나온 사람 중 상당수는 구조조정, 투자업무, 금융 부문에서 한 줄기를 형성했다. 이 무렵 떠난 공직 출신들의 또 하나의 줄기는 국내 민간 대기업의 임원이었다.

2001년 주우식 상무를 필두로 최근 곽상용 전 재경부 국제기구과장과 조부관 전 재경부 경제정책국 서기관이 각각 삼성생명 상무와 부장으로 옮겼다. 이들은 공직 시절의 전문성을 인정받아 스카우트됐다. 주 상무만 해도 재경부 국제금융과장 시절의 경험과 네트워크를 활용해 해외투자자 기업설명회에 남다른 실력을 보이고 있다.

재경부 출신인 박종원 코리안리(구 대한재보험) 사장이 98년 지금 자리로 왔을 때 ‘운 좋게 사장 자리 하나 맡았다’는 시선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박 사장은 강력한 추진력과 경영 수완으로 코리안리를 고수익 회사로 탈바꿈시켰다. 박운서 데이콤 회장, 진영욱 신동아화재 사장, 정홍식 LG 통신부문 총괄사장도 관료 출신 전문경영인 그룹을 형성하고 있다.

2000년 전후에 민간분야로 옮긴 경제관료 출신 인사들은 아쉬움도 갖고 있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을 안했다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그보다는 외환위기 직후 일은 힘들면서 경제 실패의 모든 욕을 먹어야 하는 공직 생활에 회의가 컸습니다. 공무원은 그래도 명예를 먹고 사는 직업인데….”(우병익 대표)

빛이 있으면 그늘이 있듯 경제부처 출신들이 모두 다 잘 된 것은 아니다. 이상묵 상무는 “당시 가장 많이 진출한 분야가 벤처기업”이라며 “그쪽으로 간 사람들은 요즘도 기업을 옮겨 다닐 정도로 정착을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종원 사장도 “과거에는 고위 공직자로 퇴직하면 아무래도 자리를 하나씩 줬지만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며 “이들에 대한 기업의 수요가 많이 줄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공직사회 인사적체로 공급은 늘고 수요는 줄어 이른바 ‘고위 공직자 출신 실업자’들이 늘고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그래서일까. 전직(轉職)에 대한 공직 사회의 시각도 최근엔 다시 조금씩 바뀌고 있다. 재경부의 한 사무관은 “나간 선배들이 모두 다 잘 된 것이 아니라서 요즘은 전직에 대해 좀더 신중한 분위기”라고 귀띔했다.


박현진기자 witnes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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