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포석 人事의 세계]기업⑫-금융업의 사관학교

  • 입력 2003년 8월 26일 18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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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환(金基煥) 플러스자산운용 사장이 1988년 대한투자신탁(현 대한투자증권과 대한투신운용의 전신)에 입사했을 때 주식운용팀에는 주식 시세용 단말기가 딱 한대 있었다. 그나마 종목별로 전날 종가만 나왔다. 팀원들은 A4용지에 그날 사고팔 주식의 종목과 값을 적어 사장의 사인을 받아 전화로 주문을 냈다.

김영일(金英一) 국민투신운용 주식운용본부장이 89년 한국투자신탁(현 한국투자증권과 한국투신운용의 전신)에 입사했을 때도 마찬가지. 펀드 운용은 2∼3년에 한 번씩 담당 직원이 바뀌는 보직에 불과했다.

종합주가지수가 89년 첫 1000 고지에 올라섰지만 한국의 펀드매니저는 태동(胎動) 단계였다. 투신사는 ‘대투’와 ‘한투’ 두 개였다. 그 안의 주식운용부와 조사부 직원들은 스스로 한국의 펀드매니저라는 직업을 만들어 나간 셈이다.

94년 증시에 두 번째의 1000 봉우리와 깊은 골이 생기며 두 회사에는 변덕스러운 한국 증시 속에서 담금질되어 나갈 전문적인 펀드매니저 군(群)이 생겨났다. ‘팀 체제’와 ‘스타 체제’가 번갈아 시도됐고 시장에 맞서는 방법이 선배로부터 후배에게 비전됐다.

“한투와 대투에서 훈련된 펀드매니저의 특징은 증시의 위험이 무엇인지, 그것을 어떻게 관리할지를 안다는 겁니다. 고객 돈 수천억원을 직접 굴려본 매니저와 책으로 자산운용을 공부한 90년대 후반 이후 매니저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죠.”(김기환 사장)

두 회사는 외환위기 직후인 98년부터 한국 펀드매너저의 산실이자 ‘사관학교’ 역할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뮤추얼펀드 바람을 타고 김영일 본부장이 98년 12월 미래에셋자산운용으로, 김기환 사장이 99년 3월 마이다스자산운용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스타 펀드매니저 시대가 오고 투신운용사와 자산운용사가 속속 생겨나면서 두 회사에서는 각각 수십명의 매니저가 자리를 옮겼다. 대투 출신 외환코메르츠투신운용 이재현(李在鉉) 본부장, 한투 출신 김석규(金錫圭) B&F투자자문 사장과 박종규(朴鍾奎) 메리츠투자자문 사장 등이 유명하다.

기업을 분석하고 가치를 판단하는 애널리스트의 사관학교는 단연 대우증권이다. 한국 증권가에서 대우증권 출신을 빼고는 리서치를 말할 수 없을 정도. 신성호(申性浩·우리) 백기언(白基彦·메리츠) 윤재현(尹在賢·세종) 윤세욱(尹世郁·KGI) 이종우(李鍾雨·한화) 임송학(林松鶴·교보) 씨 등 10여개 증권사의 리서치센터 책임자가 대우증권 출신이다. 이남우(李南雨) 리캐피탈투자자문 사장은 대우증권 리서치 출신 경영인이다.

대우증권 리서치의 힘은 87년 설립된 대우경제연구소에서 시작됐다. 당시 소장인 이한구(李漢久) 현 한나라당 의원과 심근섭(沈根燮) 당시 전무의 ‘무자비한’ 후배 교육이 원동력.

“오후 8시에 다음날 아침 8시까지 특정산업을 분석해내라는 지시가 떨어지기 일쑤였죠. 토요일마다 ‘토산세(토요산업세미나)’에 참석해 조사결과를 발표하는데 사실과 논리가 빈약하다며 이 소장과 심 전무의 꾸지람을 듣는 일이 많았습니다.”(신성호 이사)

이종우 센터장은 “거의 사람을 잡아 삼킬 듯한 분위기 속에서 가르쳤다”고 기억했다. 삼복더위에 냉방도 안 되는 사무실에 밤 9시까지 남아 있지 않으면 찍히는 분위기. 이한구 소장은 “내가 재무부에서 일할 때는 트럭(통금 시간에도 다니는 차)을 타고 퇴근했다”는 말로 후배들을 겁줬다.

이런 대우증권 리서치팀에는 도제(徒弟)식 교육방법이 전해졌다. 선배인 ‘사수’는 자신이 배운 모든 것을 쏟아 부으며 ‘부사수’인 후배를 1 대 1로 가르친다. 심 전무의 ‘부사수’였던 전병서(全炳瑞) 현 대우증권 리서치본부장은 “나이 30이 넘어 빨간 펜으로 머리를 얻어맞다 보면 죽고 싶을 때도 있었다”며 “그러나 당대 최고 대가에게서 배울 수 있어 행복했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99년 대우그룹 사태로 연구소가 없어지고 대우증권도 업계 1위 자리를 내놓으면서 많은 인재들이 회사를 떠났다.

기업금융의 사관학교라 불리는 장기신용은행도 마찬가지다. 이 은행은 아시아개발은행(ADB) 세계은행(IBRD) 등 해외의 민간 차관을 들여와 국내 기업에 장기 시설투자 자금으로 빌려주는 일을 해 왔다. 행원에 대한 처우도 업계 1등이라 자연스럽게 ‘일류’들이 모여들었다. 최철균(崔哲均) 녹십자 경영기획실 차장은 “한국의 경제 경영 학도들이 모여 기업금융 분야를 배우는 대학원 같은 곳이었다”고 회고했다.

98년 외환위기 때 대출 기업들이 줄줄이 부도나자 이 은행은 국민은행에 합병됐다. 자존심을 버릴 수 없었던 젊은 행원 절반 이상이 합병을 반대하다 뛰쳐나왔다. 그들은 기업금융 분야의 전문성을 살려 현재 투자은행 창업투자 기업구조조정 기업분석 및 컨설팅 등의 분야에서 활약 중이다.


신석호기자 ky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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