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價値소비'로 간다]달라진 국민 소비형태

  • 입력 2003년 5월 27일 18시 20분


코멘트
“요즘 경기 나쁜 것 맞아?”

백금정보통신 기획부의 신승호(申承浩·32) 대리는 10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공연된 대형 오페라 ‘투란도트’를 여자친구와 보러 갔다가 깜짝 놀랐다. 큰맘 먹고 15만원짜리 티켓을 끊었지만 자신과 비슷해 보이는 ‘보통 사람들’이 3만개의 좌석을 가득 메우고 있었던 것.

사실 신 대리의 최근 지출명세를 들여다보면 ‘내수 침체’ ‘소비심리 위축’의 기미는 찾아보기 힘들다. 지난해 말 200만원을 들여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왔고 80만원짜리 디지털카메라도 샀다. 올해 초에는 호주여행을 떠나는 어머니에게 50만원을 보태드렸다.

그가 과소비자일까?

“지난해 대리 승진으로 봉급이 조금 늘었지만 지출은 조금 줄였다. 저축액은 한달에 30만원 정도 늘었다. 올 들어 한 번 있었던 부서회식을 빼고는 단란주점에는 한 번도 가지 않는 등 유흥비를 줄였고 신용카드 현금서비스는 전혀 쓰지 않았다.”(신 대리)

불필요한 소비는 과감히 줄이면서도 나름대로 가치를 부여하는 소비는 망설이지 않는 ‘소비의 구조조정’이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이런 경향은 특히 20∼40대 초반의 샐러리맨들 사이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가치 있는 소비라면 안 아껴=오페라 투란도트가 공연된 8∼11일 나흘간 총관객 수는 11만명으로 세계적으로도 전례가 없는 숫자. 이 가운데 유료 입장권 판매율(후원기업이 구입한 표 제외)은 65%로 유료 관객이 절반 이하인 일반 오페라 공연보다 높았다. 최저 3만원에서 최고 50만원이었던 티켓 가운데 15만원짜리는 회사원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아 일찌감치 매진됐다.

대당 가격이 50만∼100만원인 디지털카메라의 국내 판매대수는 2001년에 25만대에서 2002년 40만대를 넘었으며 올해에는 70만∼80만대가 팔릴 것으로 예상된다. 최저가격이 500만원이 넘는 LG전자의 플라스마디스플레이패널(PDP) TV의 1∼4월 판매량은 전년 같은 기간 대비 200%가 늘었으며 신혼부부의 혼수용으로도 15% 정도가 팔리고 있었다.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와 이라크전쟁 등으로 주춤하긴 했지만 1월까지 해외여행은 급증세를 보였다. 인터넷 여행사인 넥스투어의 홍성원(洪成源) 사장은 “‘이원복 교수와 함께하는 유럽역사여행’ ‘나고야 스키투어’ 등 주제가 선명한 테마여행 상품이 비슷한 상품에 비해 20∼50% 비싸더라도 잘 팔린다”며 “일반 회사원들도 저가상품보다는 중간 이상의 가격에 서비스가 좋은 상품을 선호한다”고 말했다.

또 인터넷쇼핑몰인 CJ몰이 올 들어 판매한 러닝머신의 판매대수는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150% 늘었다. 1박 사용료가 10만원 이상인 경기도 주변의 펜션은 주말에 예약 없이는 사용하지 못할 정도로 인기가 높다. 브라운관 모니터의 2, 3배 가격인 초박막트랜지스터액정표시장치(TFT-LCD) 모니터 판매도 꾸준히 늘고 있다.

신세계 백화점 본점의 매장관리자인 신동진(申東軫)씨는 “경기침체를 고려해 최근 10만원대 남성 신사복 정장을 기획상품으로 내놓았지만 거의 팔리지 않았고 남성정장의 평균 구매단가는 45만원으로 높은 수준”이라며 “백화점을 찾는 고객은 줄었지만 실제 구입하는 사람은 가격보다 품질에 비중을 두고 상품을 선택하는 경향이 뚜렷해졌다”고 말했다.

▽무의미한 소비는 사절=인터넷 게임업체인 NHN 무선기획팀의 함성욱(咸星昱·30) 대리는 지난해 12월 결혼하면서 직장 동료인 아내와 돈을 합쳐 670만원을 들여 PDP TV를 샀다. 대신 총각시절부터 몰던 소형 마티즈 승용차를 준중형차로 교체하려던 계획을 포기했다. 18평 신혼집에 들어가는 모든 가구는 원자재를 구입, 직접 짜 맞춰 30만원에 해결했고 오디오 등 다른 가전제품은 거의 사지 않았다.

함 대리는 “긴축을 위해 술자리는 불참을 원칙으로 했으며 주말에는 외식을 하지 않고 아내와 집에서 다양한 요리를 직접 만들어 먹기로 했다”고 말했다.

소비 방식이 이렇다 보니 술집이나 외식업체가 잘될 리 없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서 단란주점을 운영하는 정모씨(42)는 “최근 기업의 접대비가 줄어든 데다 나눠 내는 방식으로 단란주점을 찾던 회사원 단골의 출입 빈도가 지난해의 절반 이하로 떨어져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이유 때문일까. 올해 3월의 위스키와 맥주 판매량은 지난해 3월에 비해 각각 9.6%, 9.1% 감소했다. 이보다 폭은 작지만 소주 판매량도 5.4% 줄어 3대 주류의 판매량이 모두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개성을 갖춘 가치소비의 확산=이런 소비패턴은 “경제가 어떻게 되든 돈 있는 나는 쓴다”던 외환위기 직후 고소득층의 소비행태와는 분명히 다르다. 특히 회사원 등 평범한 사람들이 가치 있는 소비와 가치 없는 소비를 자신의 기준으로 평가해 분명한 선을 긋는다는 점에서 ‘가치소비’가 확산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삼성경제연구소의 이동훈(李東勳) 수석연구원은 “최근 소비성향의 변화는 소득수준에 따른 소비양극화로는 설명할 수 없다”면서 “외환위기처럼 외생적 변수에 의해 급격히 소비가 준 것이 아니라 하나의 소비주체가 전체적으로 긴축하되 가치 있는 소비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소비 구조조정’의 성격이 강하다”고 말한다.

소비 방식이 바뀐 이유는 뭘까. LG경제연구원 조용수(趙庸秀) 연구위원은 “‘거품시대’였던 1996년에 1인당 국민소득 1만달러를 달성했다가 외환위기를 거쳐 지난해 다시 1만달러에 이르는 6년 동안 한국의 소비자들은 대단히 영리해졌다”고 지적한다. 외환위기로 절반 가까운 소득의 추락, 벤처바람으로 일확천금의 기회를 얻었다가 날려버린 일, 부동산 가격의 폭락과 급등, 신용카드 사용 확산에 따른 신용불량문제 등을 경험하면서 일반인들의 소비 방식에 분명한 ‘학습효과’가 나타나고 있다는 분석이다.

박중현기자 sanjuck@donga.com

이은우기자 libra@donga.com

이나연기자 larosa@donga.com

▼전문가들 분석 ▼

예종석(芮鍾碩) 한양대 경영학과 교수는 “소비 구조조정은 과거 선진국에서 나타났던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진단했다.

김종석(金鍾奭) 홍익대 경제학과 교수는 “1인당 소득 1만달러 시대를 맞아 소비가 생존을 위한 수단에서 자아실현의 방법으로 바뀌고 있다”고 분석했다.

전후 세대에 비해 풍요롭게 자란 젊은 층이 국민소득 증가를 계기로 다양한 자아실현 욕구를 드러내고 있다는 얘기다.

이들의 소비 패턴은 80년대 미국의 키워드였던 ‘건강(health) 레저(leisure) 비공식(informal) 젊음(youthfulness)’ 등을 보여주고 있다. 건강을 우선 고려하고 레저를 즐기는 데 주력한다. 또 틀에 맞추기보다 비공식적인 자유로움(다양성)을 추구하고 젊어지는 데 초점을 맞추는 셈이다.

예 교수는 “80년대 일본에서 ‘건(健康·건강)고(高級·고급)유(遊戱·유희)정(情報·정보)’이란 말이 나왔다”고 설명했다.

정반석(鄭盤石)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한국에서는 청소년이 소비를 주도하는 경향이 외국에 비해 강하다”면서 “한국 소비의 빠른 변화 속도는 젊은 층이 주도하는 인터넷 문화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김 교수는 “과거 전후 세대는 미래를 위해 소비를 줄였지만 요즘 젊은 층은 미래를 위해 현재의 즐거움을 포기하지 않는다”라고 진단했다.

청소년 주도의 다양성, 미래에 대한 낙관, 인터넷을 통한 빠른 변화 속도 등이 한국 소비 구조조정의 특징인 셈이다. 이 같은 소비 구조조정은 ‘집단적 감성주의’나 ‘충동주의’ 등 특성도 동반하기 마련. 그러나 예 교수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만 않는다면 어떤 소비행태도 비판해서는 곤란하다”며 다양성에 대한 사회적 관용을 강조했다.

소비 구조조정은 가계 기업 정부 등에 새로운 대응을 요구하고 있다.

가계에서 부모는 노동의 대가로 소비할 수 있다는 원칙을 자녀들에게 심어줘야 한다. 소비 다양화에 따른 새로운 소비자 보호대책을 세우는 것은 정부의 몫. 기업은 변하는 소비자 욕구에 맞는 상품과 서비스를 한발 앞서 제공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이은우기자 libra@donga.com

▼수치로 본 가계지출 패턴 ▼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개인들의 소비 패턴에서 크게 달라진 점은 ‘소득의 변화에 따라 소비를 탄력적으로 조정하게 됐다’는 것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외환위기 이후(97년 4·4분기∼2003년 1·4분기)의 분기별 소득증가율과 소비증가율의 변화는 각각 외환위기 이전(71년 1·4분기∼97년 3·4분기)에 비해 각각 2배, 4배로 커졌다.

안용성(安容成) 한은 국민소득통계팀장은 “외환위기 이후 소득의 변화율에 비해 소비의 변화율이 더 커진 것은 가계가 소득 변화에 따라 민첩하게 소비를 조절한다는 증거”라고 설명했다.

지표에 따르면 최근 가계는 소득의 감소보다 더 급격히 소비를 줄이는 것으로 분석된다.

올 1·4분기 국내총생산(GDP)은 전 분기에 비해 0.4% 줄었지만 개인들은 씀씀이를 2.1% 줄였다. 외환위기 직후인 98년 1·4분기(―12.5%) 이후 처음으로 개인들의 소비증가율이 마이너스로 돌아선 것이다.

이나연기자 larosa@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