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천광암/‘상품권 카드결제’ 오락가락

  • 입력 2002년 9월 30일 17시 23분


대형 백화점들이 개인 신용카드를 내는 사람에게는 상품권을 팔지 않겠다고 조만간 공식 선언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미 예견됐던 일이다. 정부가 7월 26일 여신전문금융업법 시행규칙을 바꿔 상품권을 카드 결제대상에 포함시키겠다고 입법예고했을 때부터 백화점 업계는 줄곧 반대해왔다.

상품권의 값어치가 떨어지고 상품권이 ‘카드깡’ 대상으로 전락한다는 것이 반대 이유다.

백화점 업계를 탓할 일만은 아니다. 업계로선 중대한 이해(利害)가 걸린 일인데다 나름대로 일리도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재정경제부의 석연치 않은 태도다.

이기호(李起浩) 대통령경제복지노동 특보가 8월 14일 한 조찬모임에서 “입법예고안을 재검토하도록 하겠다”고 말했을 때까지도 재경부의 방침은 흔들림이 없었다.

당시 재경부 당국자는 “충분히 검토한 만큼 시행규칙을 바꾸지는 않을 것”이라고 이 특보의 발언을 일축했다. 상품권 구입 허용은 국민의 신용카드 사용 생활화와 규제 완화를 위한 조치로 ‘카드깡’ 등 부작용은 국세청의 단속 등을 통해 줄여나가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재경부가 9월 27일 발표한 여신전문금융업법 시행규칙 확정안은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상품권 발행자는 상품권을 카드로 판매하지 않을 수 있다’는 조항을 넣어 백화점 등이 카드 결제를 합법적으로 거부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줬다.

재경부는 “카드깡의 후유증이 처음 생각할 때보다 심각할 것 같아서”라는 이유를 내세웠다. 그러나 이는 음란물로부터 청소년을 보호하기 위해 인터넷 사용을 금지시켜야 한다는 군색한 논리나 다를 바 없다.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하고 싶지만 “떠들지 않는 권리는 보호하지 않는 게 관료의 생리”라는 재경부 한 국장의 말이 귓가를 떠나지 않는다.

입법예고기간에 백화점업계는 사장들이 직접 재경부에 찾아가 고위 당국자를 만나는 등 활발한 설득 작업을 벌였다. 반면 상품권 카드결제를 허용해달라고 재경부를 찾아간 소비자는 없었을 것이다.

천광암기자 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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