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건설 총선로비]계열사 매각때 로비자금 챙겨

  • 입력 2000년 6월 5일 03시 09분


동아건설의 고병우(高炳佑)회장이 4·13 총선 후보자들에게 ‘로비자금’을 뿌리기로 작정하고 이창복(李彰馥)사장과 유영철(劉永哲)고문, 대한통운 곽영욱(郭泳旭)사장을 자신의 사무실로 부른 것은 3월말경.

고회장은 영문도 모른 채 불려온 이사장 등에게 로비배경을 간단히 설명한 뒤 신문에 보도된 ‘16대 국회의원 후보자 명단’을 보고 미리 선정해둔 168명의 명단을 배분했다.

“김○○의원에게는 ○○○이 가쇼.”

참석자의 출신지와 학력, 연고(緣故) 등을 감안해 고회장이 이런 식으로 한 사람씩 불러주면 각자 받아 적는 식으로 배분했다는 게 당시 참석했던 임원들의 얘기.

그러나 로비대상자 배분은 순조롭지 못했다. 고회장이 적자투성이인 동아건설보다 대한통운쪽에 손을 벌릴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곽사장이 반대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실제 곽사장은 고회장이 로비자금 조달을 요청하자 “회사 일을 노조가 모두 챙기고 있어 불가능하다”며 거부했다고 회사 고위관계자들은 전한다.

곽사장은 또 로비대상자가 너무 많아 자칫 로비 사실이 샐 가능성이 많다는 점도 제시했다는 것.

그러나 고회장이 곽사장의 우려를 무시하고 나머지 두 참석자도 고회장의 의견에 별다른 이견을 제시하지 않아 로비는 예정대로 시작됐다.

충남 출신이지만 영남인사들을 많이 알고 있던 이사장에겐 충청도 및 경상도 인사들이 주로 할당됐고, 본관이 강릉인 유고문에겐 강원도와 수도권 인사들이 주로 배분됐다. 충남 금산에서 태어났지만 전북에서 고교를 다닌 곽사장에겐 전북권 인사들이 일부 할당됐다.

이들 3인에게 할당된 숫자는 적게는 10여명에서 많게는 50여명까지. 나머지는 고회장이 직접 챙겼다는 게 관계자들의 얘기. 특히 상당수 영남권 인사들은 고회장의 몫이었다.

전북 군산 출신인 고회장이 여당보다 야당 인사들을 더 많이 챙긴 이유는 야당쪽에 지인이 더 많았기 때문. 고회장은 93년 김현철씨와의 인연으로 YS정권에서 비록 10개월의 단기간이었지만 건설부장관을 지내며 영남권 정치인들을 많이 알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로비는 즉각 시작됐다. 대상자들을 A, B, C, D의 4등급으로 분류해 2000만∼500만원이 극비리에 전달되기 시작한 것.

전달은 주로 ‘심부름꾼’이 직접 후보자의 사무실을 은밀히 방문, 후보자나 선거관계자들에게 건네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자신들이 직접 전달할 경우 남의 눈에 띌 수 있기 때문이었다. 고회장의 심부름은 한 이사급 간부가 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일부 대상자들에게는 이들 임원이 직접 전달하기도 했다. 부하직원에게 돈 심부름을 시키려다 그 직원으로부터 항의를 받았기 때문이다.

로비자금은 주로 계열사 매각과정에서 조성한 리베이트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 일부는 회사 기밀비를 사용하기도 했다는 게 동아건설 간부들의 얘기.

그러나 대상자 168명 전원에게 돈이 전달된 것은 아니다. ‘돈 전달’ 작업이 시작된지 1주일도 채 안돼 동아건설 및 대한통운의 노조에 로비첩보가 입수됐고 노조가 진상공개와 중단을 요구했기 때문. 특히 대한통운 노조측은 고회장이 로비자금을 대한통운에서 조달하려 한다는 소문을 근거로 “워크아웃 기업이 무슨 돈으로 정치인들에게 선거자금을 대주느냐”며 강력 항의했다는 것.

그러나 적어도 100명 이상의 후보자들에게 돈이 전달됐다는 게 동아건설 임직원들의 한결같은 견해. 특히 최초의 공모자 4명 가운데 일부는 선거일 직전까지도 돈을 전달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와 관련, 동아건설 고위관계자는 “노조측이 로비첩보는 입수했지만 물증을 갖고 있지 않아 고회장 등이 로비사실을 부인하자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했다”며 “선거 사흘 전까지도 돈을 전달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本報입수 '45인 명단' 분석…前총리-부총재등 거물급 수두룩▼

동아일보 기획취재팀이 극비리에 단독 입수한 동아건설의 로비대상자 명단은 45명. 그러나 이는 일부이고 총 로비대상자는 168명으로 이는 이번 총선의 전체 지역구 숫자(227개)와 비교할 때 4분의 3에 해당한다.

‘45인의 명단’을 보면 대부분 전직 총리와 장관, 그리고 전현직 의원들로 모두 4·13 총선에 출마한 쟁쟁한 인사들. 국회 상임위원장은 물론 각 당의 부총재들도 상당수에 이른다.

이들 가운데 4월초 로비 당시 현역의원은 35명. 나머지 10명도 현역의원은 아니지만 전직 총리나 장관급 인사들로 누구나 알 수 있는 유명인사다.

눈길을 끄는 것은 호남 지역구 인사가 단 한 명도 없다는 점. 영남에서 15명, 서울과 인천 경기에서 각각 9명, 8명이었던 것과 대비된다. 그러나 이는 이 지역 인사들에게 로비를 하지 않았다기보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로비대상’이 있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하는 대목. 로비의 총지휘자인 고병우회장이 호남출신인데다 호남이 집권당의 텃밭인 점을 감안할 때 더욱 그렇다.

당별로는 한나라당 소속이 19명으로 가장 많고 이어 민주당 16명, 자민련 7명, 민국당 2명, 무소속 1명의 순이다. 이들 가운데 27명은 당선됐으나 18명은 낙선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 인사들은 각각 16명과 7명이 당선됐다.

당시 현역의원들을 기준으로 할 때 소속 상임위는 건설교통위와 농림해양수산위 소속이 각각 6명으로 가장 많았고 재정경제위가 5명이었다. 동아건설이 부도를 내 워크아웃이 실시되고 있었던 점을 감안할 때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목이다.

그러나 산업자원위와 환경노동위 국방위는 각 3명, 정무위와 통일외교위 행정자치위 각 2명, 과학기술위 문화관광위 법제사법위 소속도 각 1명씩 있어 로비가 개인적 인연 등에 따라 ‘무차별적’으로 이뤄졌음을 보여준다.

▼高炳佑씨는 누구인가?▼

4·13 총선 당시 국회의원 후보자들에게 전방위 로비를 펼친 고병우(高炳佑·67) 동아건설 회장은 사실 ‘짠돌이’로 소문난 인물이다. 98년6월 취임 이후 고회장에게 개인적으로 식사대접을 받은 임원들이 거의 없다는 게 주변의 전언.

고회장의 월평균 판공비가 400만원인데 반해 이창복(李彰馥)사장의 판공비는 1200만원이 넘는 점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회사 주변에서는 이번 고회장의 무차별 ‘융단 로비’를 의아하게 생각하는 이가 적지 않다. 그러나 고회장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그를 ‘대단히 정치적인 성향을 지닌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93년 김영삼정권 초기 건설부장관으로 입각한 것도 김대통령의 차남 현철(賢哲)씨를 통해 이뤄졌다는 게 정설.이번 로비가 정계입문을 위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이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또 그는 호남출신임에도 불구하고 YS정권에서 일한 인연으로 정치인들 중에 한나라당 등의 구여권 정치인들과 더 교분이 두텁다.

업무와 관련해서는 독선적인 스타일이라는 게 중평. 취임 2년도 안돼 임직원들로부터 경영실적 미비로 퇴진 압박을 받는가 하면 최대계열사인 대한통운이 결별을 선언하면서 동아건설이 걷잡을 수 없는 내홍을 겪게 된 것도 이런 고회장의 경영 스타일에서 원인을 찾는 이가 적지 않다.

전북 군산 출신인 고회장은 서울대 경제학과 은사의 천거로 63년 경제과학심의위원회 제1조사분석실 상공담당관으로 관계에 입문했으며 이후 청와대비서실 경제비서관(73∼75년)을 거쳐 재무부 기획관리실장(78∼80년)을 지냈다. 이후 쌍용중공업 부사장(81년), 쌍용투자증권 사장(83∼90년), 한국증권거래소 이사장(90∼93년) 등을 역임했다. 그는 98년 최원석(崔元碩)동아건설 회장이 물러난 뒤 채권단에 의해 전문경영인으로 회장에 선임됐다.

<기획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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