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증권사, 재경-금감원 출신들 "낙하산인사"

  • 입력 2000년 6월 2일 18시 36분


재정경제부와 금융감독원 등 금융당국의 간부급 인사들이 은행과 증권 투신사 등 금융기관으로 내려가는 이른바 ‘신관치 인사’가 금융계 전반에 갈수록 노골화하고 있다.

특히 증권사 등 일부 민간금융기관의 경우 감독당국과의 업무협조 및 로비활동을 위해 관계인사를 경쟁적으로 영입해 ‘관경(官經)유착’에 따른 폐해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증권회사들이 일제히 주주총회를 열었던 지난달 27일. 모 증권회사의 주주총회장에선 낯선 풍경이 연출됐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증권사를 감독했던 금융감독원출신 인사가 감사로 선임된 것이다. 얼마전까지 증권사들이 불법을 저지르지 않나 눈에 불을 켜던 감독책임자들이 하루아침에 변신해 증권사를 위해 일한다는 게 왠지 어색하다는 것이 주주들의 지적이었다.

이날 주총에서 증권사 감사 및 감사위원으로 자리를 옮긴 금융감독원 인사는 모두 3명. 이에 앞서 둥지를 튼 인사를 포함하면 감독원 출신 감사는 12명에 이른다. 증권사 감사자리가 금감원 퇴직직원들의 ‘양로원’이 되어간다는 비난이 나올 정도다.

그렇다면 이들은 과연 제 역할을 하고 있을까. 금감원 관계자는 “감독업무를 하면서 익힌 노하우를 증권사 업무감시에 적용하는 것은 금융기관에 이득이 되지 결코 손실이 아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민간기업의 속성상 감독의 노하우를 발휘할 기회는 거의 없다.

작년에 적발된 현대전자 주가조작사건이 대표적인 사례다. 98년 현대그룹 계열사들이 2200억원을 들여 현대전자 주가를 조작했을 때 현대증권에는 증권감독원 검사3국장을 지낸 전수섭(田秀燮)감사가 있었다. 또 현대전자 주가조작이 적발됐을 때는 금융감독원 경영지도국장을 역임한 김기영(金基永)씨가 현대증권 감사였다. 이들이 제대로 감사역할을 했다면 주가조작을 사전에 막을 수 있었을 것으로 증권가는 보고 있다.

증권사의 한 직원은 “감독원 출신이 감사를 하는 게 아니라 금감원의 지시사항을 전달하고 증권사를 통제하는 심부름꾼 역할을 하는 게 아니냐”고 반문했다.

정부나 감독원 출신 인사를 경쟁적으로 데려가려는 증권사의 행태도 문제다. ‘힘있는 인사’가 내려오면 구조조정의 칼날을 피하기 쉽고 문책을 받을 경우 징계수위도 상당히 낮출 수 있다는 속셈이 깔려있다.

투자신탁회사의 부실도 따지고 보면 이런 낙하산인사의 산물이다. 투자신탁회사 사장은 구재무부나 관변 인사들이 번갈아 가며 했다. 이근영 현 산은총재, 변형 전 한국투자신탁사장, 김종환 전 대한투자신탁사장, 이종남 전 한투사장 등이 모두 이른바 ‘모피아(재무부 출신들을 마피아에 빗대 일컫는 속어)’에 속한다. 이들이 재무부 출신이었기에 정부의 협조요청에 따라 언제든지 주식을 사도록 ‘지시’할 수도 있었고 그 결과 투신사 부실은 눈덩이처럼 커졌다.

이런 점에서 낙하산 인사는 금융부실의 원인(遠因)이라고 볼 수 있다.‘금융통제전문가’들이 경영하는 금융기관들이 비즈니스 마인드로 이익을 내고 건실한 경영을 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외환위기 이후 관치인사가 잠시 주춤했던 때가 있었다. 국제통화기금(IMF)의 주문 때문이었다. 한때 김정태주택은행장 김진만한빛은행장 등 이른바 ‘장사꾼’을 자칭하는 금융전문가들이 등장하기도 했지만 이런 움직임은 어느새 사라졌다. 최근엔 과거보다 더 노골적인 낙하산인사가 횡행하고 있는 것이다.

금융계의 한 인사는 “정권 후반기가 되면 퇴임전에 한자리 봐줘야 할 사람도 있고 더군다나 금융구조조정을 앞두고 있어 이런 낙하산 인사가 더 기승을 부릴 것”이라고 말했다.

3월에 있었던 금융감독원 김상훈(金商勳)부원장의 국민은행장 취임이 좋은 예다. 구조조정의 외피를 두른 신관치 사례로 거론되고 있다. 정부가 내세운 ‘은행 대형화’를 주도하기 위해 재정경제부 이헌재(李憲宰)장관의 의중을 잘 아는 인사를 내려보냈다는 게 금융계의 평가다.

경실련 위평량(魏枰良)정책부실장은 “정책이나 인사를 통한 정부의 개입은 단기적으로는 효과를 볼 수도 있지만 나중에 더 큰 피해를 불러온다”며 “더욱이 낙하산인사는 원칙과 소신을 기대하기 어려워 폐해가 막심하다”고 말했다.

<이진기자>lee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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