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유동성위기]외국전문가가 보는 해법

  • 입력 2000년 5월 30일 20시 24분


현대사태가 외견상으론 진정국면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국내경제와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는 외국전문가들은 이번 사태가 현대건설의 단순한 유동성위기에서 촉발된 것이 아니라 재벌의 구조조정 미흡과 취약한 금융구조에서 비롯된 것으로 바라보고 있다. 따라서 한국의 금융위기는 향후 금융 및 기업구조조정 성과 여부에 따라 악화될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이다. 홍콩 BNP 파리바은행 워렌 마 애널리스트 등과의 국제전화를 통해 이들의 의견을 정리해본다.

▼주주권한 확대 필요▼

▽워렌 마(BNP 파리바은행 홍콩 본부 선임애널리스트)〓한국 금융시장의 문제는 영남종금의 영업정지, 새한그룹 워크아웃, 현대건설 유동성 불일치(미스매치) 등 일련의 악재가 1차 요인이다. 그러나 홍콩시장의 아시아 분석가들은 한국이 그동안 투신사 문제해결을 미뤄온 것을 근본적인 원인으로 보고 있다.

한국 정부가 인위적 개입 대신 ‘시장의 힘’을 최대한 활용하려 한 것은 적절한 조치였다. 현대 문제에서 불거진 것은 재벌그룹의 경영방식이다. 현대건설 지원에 계열사인 현대전자(27.6% 지분보유)가 깊숙이 개입했다. 정주영 명예회장이 퇴진하느냐, 마느냐도 쟁점이 아니다. 정명예회장은 물러나더라도 얼마든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홍콩시장은 보고 있다. 아시아지역 재벌그룹의 지배구조가 IMF를 거치면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현대사태를 겪으면서 주주들이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주주 권한이 제도적으로 확대돼야 지배구조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우선 투신사를 중심으로 자금이 돌도록 하는 것이 첫 단추다. 투신사는 주식 채권 기업어음(CP)을 거래하면서 윤활유 역할을 하는 독특한 존재다. 현재로선 투신사의 운명을 아무도 모른다. 투자자들의 돈이 투신사를 떠나 은행으로 몰리고 있는데 불안한 측면이 있다. 7월이면 4조9000억원이 대한투신 한국투신으로 투입되는데 이것이 투신사 문제의 끝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투자자 신뢰회복 시급▼

▽빌 헌세이커(ING베어링스 상무)〓현대문제는 단기적인 유동성에서 비롯됐다. 97∼98년 대량 발행했던 회사채가 만기가 다가오면서 미스매치가 생긴 것이 직접원인이다. 그 이면에는 투신권에 대한 투자자들의 신뢰 문제와 채권시장의 기능 회복 문제가 깔려 있다. 이런 문제들이 해결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린다. 당장 6,7월만 해도 수익증권 환매 물량이 여전히 적지않은 부담이 돼 증시 분위기가 바뀌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한 상황이다. 현대와 정부, 채권단이 이런 사정을 잘 파악하고 있으니까 잘 될 것으로 본다.

외국인투자자들도 이런 점을 잘 알고 있다. 논리적으로 빨리 해결될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 당장 한국 주식을 팔기보다는 일단 그대로 갖고 가면서 상황전개를 지켜보자는 분위기다. 외국인의 한국에 대한 투자비중은 여전히 꽤 높은 편이다.

▼리더십 부재 드러내▼

▽조지오 모이제(앤더슨컨설팅 한국사무소 전략기획담당이사)〓이번 현대문제는 단순하게 보면 단기유동성 부족으로 인해 불거진 ‘금전적’ 문제로 볼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 리더십 부재를 드러냈다는 점에서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대표적인 한국 기업이기 때문에 한국 주식시장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뿐만 아니라 한국경제 신뢰도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런 상황을 감안할 때 현대는 보다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크게 네 가지 해결책을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로는 보유 부동산을 처분하는 것. 두번째로는 이익이 나지 않는 사업의 청산이며 다음으로는 비록 이익이 난다 하더라도 핵심 사업이 아닌 것은 정리하는 게 바람직하다. 마지막으로 현대그룹의 총수 일가는 이사회 주주로서의 역할에 충실해야 하며 경영은 해외 경제 흐름에 밝은 전문 경영인에게 맡겨야 한다.

중요한 것은 이런 해결방안을 하루빨리 수립, 국내외에 발표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현대는 한국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해온 기업이므로 이 정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저력은 충분히 갖췄다고 본다.

▼해결방안 공개해야▼

▽베르트랑 프앙토(베인앤드컴퍼니 한국지사장)〓현대그룹 전체의 위기라는 징후는 아직까지 없다. 하지만 이번 일로 현대가 신뢰를 잃었기 때문에 또다른 부실계열사로 문제가 확산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특히 외국인들은 지난번 대우사태 때 처음에는 일부 계열사의 문제로 비쳐졌지만 끝내 그룹 전체가 넘어가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이번 사태에 대해 첨예하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번 사태가 조기에 수습된다면 한국경제 전체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 거시적 지표들이 아주 좋기 때문이다.

문제 해결의 열쇠는 역시 현대가 쥐고 있다. 우선은 이런 사태를 초래한 경영진을 퇴진시켜야 한다. 능력이 없다는 사실이 입증된 것이므로 주주의 신뢰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라도 이같은 조치가 필요하다. 그리고나서 능력이 검증된 전문 경영인을 하루 빨리 영입해야 한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투명성이다. 현대는 앞으로 어떻게 문제를 풀어나갈 것인지 단기적인 전략과 장기적인 전략을 있는 그대로 공개해야 한다. ‘땜질’식으로 문제를 봉합하려면 상처가 더 곪을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특히 계열사간 지원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것은 최악의 방책이다.

▼핵심사업 제외 정리를▼

▽마이클 홀스버그(ABN·AMRO한국지점장)〓현대사태는 전적으로 경영의 투명성 부재에서 비롯됐다. 외국인투자자들은 현대의 경영진이 주주들의 이익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 여부에 의문을 갖고 있다.

이번 사태에서 단기유동성 부족 문제는 전적으로 현대그룹 내부의 문제이지 한국경제 전체의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따라서 한국 국민이 크게 걱정을 하고 있지만 현대그룹이 어차피 이 문제를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하고 또 해결할 수 있으므로 확대 해석할 필요는 없다.

현대가 유동성 부족을 해결하고 시장의 신뢰를 다시 얻기 위해서는 핵심 사업을 제외한 나머지 사업을 정리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설령 현재 이익을 내는 기업이라도 과감하게 매각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또한 경영 결정권에 중대한 변화가 있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현대가 이번 문제를 단기적으로 해결하더라도 거기에 그치지 않고 앞으로도 계속 변화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신뢰 회복이 가능하다.

<금동근·이철용·김승련기자>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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