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재벌들은 현재의 경기침체가 경기순환에 따른 것이라서 곧 반전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구조조정에 나서지 않는 한 그들이 겪을 고통은 영원해 보인다」.
영국 경제지 이코노미스트는 18일자 한국경제에 관한 특집에서 한국기업 위기의 핵심을 이렇게 찔렀다. 부도 도미노에 따른 금융시장의 교란을 탓하기에 앞서 자체의 경쟁력 약화를 타개해야 한다는 비판이다.
기업들의 「몸집 키우기」 경영은 「거품」으로 남아 기업은 물론 경제 전체의 목을 죄고 있다. 사업계획을 세우면서 가장 중요한 자금조달 능력이나 경쟁환경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는 사례가 30대 재벌중에도 여전히 남아있다.
지난 수년간 대기업들이 유행처럼 표방한 「2000년 비전」엔 투자계획만 열거되고 있을 뿐 자금 조달계획이 빠져 있다. 「필요없는 사업에서 과감히 철수하겠다」고 선언한 그룹들도 총수가 직접 선언한 중장기 매출목표를 달성하려면 지금같은 불경기에도 매년 20∼30%씩 매출을 늘려야 할 판이다.
사업계획의 거품은 특히 신규사업 진출때 위기를 불러왔다. 기아 진로 등 본업에서 잘 나가던 기업들이 해체 상황에 놓인 것은 차입능력만 믿고 특수강 유통 등 이것저것 손댔기 때문이다.
한 중견업체 자금담당 임원은 『매번 신규투자 계획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돈을 꿔오지 못하면 무조건 「능력없다」고 치부하는 현실 때문에 은행문을 두드리곤 한다』고 말했다.
30대 그룹중 다수가 사업구조 조정에 착수한 95년부터 2년동안 이들의 수도권 보유토지는 3백12만평 늘었다. 땅을 지렛대 삼아 위기를 넘어서려는 구태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 경영권 보호를 명분으로 적대적 인수합병에 반대입장을 취했던 재계가 최근 관련 규제의 철폐를 요구하는 모순은 상당수 기업들이 현 위기상황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다만 LG 포철 현대 등 일부 재벌들을 중심으로 뒤늦게나마 「규모경영」을 탈피, 「가치경영」으로 돌아설 조짐을 보이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사용한 자본의 조달비용과 사업의 수익성을 비교해 사업존속 및 신규사업 결정을 내려보려는 시도들이다. 김일섭(金一燮)삼일회계법인 부회장은 『현재와 같이 소수의 경영진이 수십조원의 매출을 올리는 기업군을 이끄는 방식으론 21세기를 버티기 여려울 것』이라며 『특정 사업을 선택, 자원을 집중하는 경영형태가 바람직하다』고 강조한다.
「선택과 집중」경영이 부각되면서 현재의 기업 인수합병이나 퇴출제도를 대폭 보완해야 한다는 주장이 어느때보다 설득력을 얻고 있다. 외국기업의 투자장벽을 없애는 다자간투자협정(MAI)이 채택될 마당에 한계기업 도산방지장치나 경제력집중을 막는 각종 규제를 탄력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한구(李漢久)대우경제연구소 소장은 『제조법인 금융기관 할 것 없이 모두 강도높은 경영합리화에 나서야 할 때』라고 말하면서 『단기적으로 기아사태를 신속히 해결하고 중장기적으로 기업들의 구조조정 작업을 도와줄 시스템을 정착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박래정·천광암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