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보가 남긴것/대출심사]은행「기업 신용평가」 주먹구구

  • 입력 1997년 5월 18일 20시 16분


『담보 있으면 돈 빌려주고 담보 없으면 안 빌려주는 국내은행은 은행이 아니라 전당포예요. 정책금융과 관치금융에 익숙해진 탓이 크지만 외국은행과 비교하면 신용평가나 위험(리스크) 관리능력이 영점입니다』(은행감독원 Y국장) 『기업들이 세무서에 가져가는 서류와 은행에 가져오는 서류가 다른데 뭘 믿고 신용평가를 합니까』(시중은행 B심사역) 『기업 경영사정은 회사를 직접 방문해서 공장과 창고를 한번만 둘러보면 금세 알 수 있습니다. 은행원들은 회사에 잘 오지 않고 오더라도 사장실에서 차만 마시고 가요. 그러고 앉아서 담보타령만 합니다』(잡화수출업체 K회장) 禹贊穆(우찬목)전조흥은행장은 지난달 11일 한보청문회에서 『총대출액이 3천억원에 달하던 지난해 4월까지 한보의 자금난을 알지 못했느냐』는 질문에 『은행간 정보교환이 없어 몰랐다』고 대답했다. 또 불행한 후배 은행인들이 나오지 않도록 당부하고 싶은 말이 없는지 묻자 『기업 분석력을 키워야 한다』고 답했다. 이 발언에 대해 금융계에서는 「행장의 책임회피」라는 비판적인 의견도 많지만 은행의 신용평가 및 위험관리능력 부재가 대형부도를 불렀다는 데는 공감을 표시한다. 요즘에서야 은행들은 한 기업만이 아니라 그 기업이 속한 그룹의 전체 신용도를 심사한 뒤 대출을 결정하는 방향으로 제도와 관행을 바꾸고 있다. 뒤집어 말하면 재벌기업 계열사들이 상호 빚보증으로 복잡하게 얽혀있는 데도 은행들은 거래기업 이외의 계열사에 대해선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얘기다. 특정기업이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대출하는 금융기관은 하나도 없다. 지난 95년 덕산그룹 부도 때는 이 그룹에 대한 은행권의 여신이 얼마나 되는지 몰라 허둥대기도 했다. 올해 한보와 삼미 부도 때는 은행연합회 기업여신정보망에 집계된 대출액수와 실제 대출액수 사이에 수천억원의 차이가 나기도 했다. 할부금융회사나 파이낸스사 등의 여신은 아예 집계조차 되지 않고 있다. 한 파이낸스사 간부는 『거래기업의 금융부채 총액은 다른 금융기관들의 눈치를 봐가며 대충 짐작하는 수준』이라고 털어놓는다. 대출이 외부영향력 또는 담보나 보증유무에 따라 주로 결정되다보니 은행의 신용평가는 요식행위에 그칠 때가 많다. H은행은 12명의 신용조사인력이 연간 8백건 이상의 신용조사보고서를 작성한다. 한 기업체의 신용도 조사에 걸리는 기간은 길어야 4,5일이어서 신용평가전문기관에서 최소한 한달을 잡는 것과 대조적이다. 게다가 은행의 신용조사인력은 3년 단위로 순환근무를 한다. S은행 기업신용조사부의 경우 해당부서 근속연수는 평균 2년, 가장 긴 사람도 4년에 못미친다. 더구나 국내은행에는 기술적인 문제를 검토해 신용평가를 할 전문인력이 거의 없다. 청문회에 나온 은행장들은 『한보철강의 코렉스공법이 경제성이 있는지 여부를 제대로 평가할 수 없었다』고 한결같이 시인했다. 기술변화를 평가할 능력이 없다보니 국내 은행의 신용평가는 기업의 재무제표에 의존한다. 외국은행들은 「재무제표는 그 기업의 과거 재무상태를 보여주는 자료이기 때문에 대출심사자료로는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현금흐름(캐시플로)을 중시하고 있지만 국내 은행들은 캐시플로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 은행관계자들은 신용평가가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을 은행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모은행 기업분석부의 간부는 『기업재무제표 중 재고항목이나 외상매출금 가지급금 항목 등에는 분식결산 흔적이 많다』며 『가짜 숫자를 분석해보았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말했다. 한 시중은행장은 『상무시절 한 재벌기업의 캐시플로를 알아보라고 지점장에게 지시했다가 「왜 남의 기업 내부기밀을 알려고 하느냐」며 이곳저곳에서 압력이 들어오는 바람에 혼난 적이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신용평가전문회사의 신용평가도 역시 미덥지 않다. 대형부도 때마다 이들 전문회사는 평가 잘못으로 벌점을 받고 뒤늦게 신용등급을 하향조정하는 소동이 벌어진다. 한보부도 때는 한국신용평가와 한국기업평가가 한보철강의 회사채를 「투자적격」으로 엉터리 판정했다 해서 1개월씩 영업정지를 받았다. 두 회사는 현재 부도상태나 다름없는 진로의 회사채에 대해서도 A등급을 줬던 것으로 드러났다. 부도 때마다 신용평가회사들이 홍역을 치르는 것은 후진적 심사기법탓도 있지만 발주자의 의사를 거스르지 못하는 사정이 더 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한 신용평가회사 관계자는 『지난 92년 「신용평가등급을 한단계 높여달라」는 J그룹의 요구를 거절했더니 J그룹은 그후 지금까지 14차례의 신용평가를 하면서 한번도 우리에게 일감을 주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한편 외국은행들이 신용평가 못지않게 중시하는 포트폴리오(위험분산)에 대해서도 국내은행들은 둔감하다. 90년대초 시중은행 중 부동의 1위자리를 지키다가 최근 3년사이 유원 우성건설 한보 삼미의 잇따른 부도로 경영위기에 몰린 제일은행이 대표적인 예다. 외국은행의 한 관계자는 『제일은행이 한보라는 특정기업에 1조원이 넘는 돈을 대출해준 점도 이해하기 어렵지만 건설과 철강업종에 얼마나 돈을 몰아줬기에 이렇게 줄줄이 부도에 연루되는지 알 수 없다』고 꼬집었다. ▼ 외국은행 신용평가 실태 ▼ 담보와 보증 유무로 대출여부를 결정하는 국내은행들과는 달리 외국은행들은 신용을 기준으로 대출한다. 그래서 돈을 떼이는 사례는 극히 드물다. 선진국 은행들은 과학적인 방법으로 신용조사를 하고 신용등급에 따라서만 대출여부와 액수를 결정하며 위험분산 관리를 철저히 한다. 대출결정 때 공통적으로 중시하는 것은 현금흐름이다. 씨티은행의 경우 먼저 산업별로 목표고객을 정한다. 호황인 산업은 랭킹 5위 기업까지, 불황산업은 랭킹 1위만 거래한다는 식이다. 다음엔 목표고객으로 정해진 기업에 대해 자체신용평가를 한다. 신용평가등급은 8단계로 나눠지며 등급에 따라 대출한도가 정해진다. 장사를 아무리 잘하는 기업이라도 대출한도 이상의 대출은 생각할 수 없다. 심사담당 임원은 『대출한 뒤에는 산업별 기업집단별로 한쪽에 돈이 쏠리는지를 꾸준히 점검한다』고 말했다. 체이스은행도 씨티은행과 비슷하다. 특히 심사대상기업의 시장환경과 자금사정 등이 최악의 상황에 처하게 됐을 경우를 가정해 각종 수치들을 자체분석모델에 대입한 뒤 부채를 상환할 수 있다는 결과가 나와야만 대출을 한다. 한 중간간부는 『경제분석가들이 산업동향을 분석해서 각 산업별로 사전에 총대출한도를 정하며 매일매일 산업별 대출잔액을 점검, 아무리 호황인 산업도 대출한도를 넘지 않도록 관리한다』고 설명했다. 〈천광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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