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체 보강이 일상된 미래 시대
예술 활동 위해 병약한 몸 택해
◇빛의 조각들/연여름 지음/264쪽·1만7000원·오리지널스
작품 속 세계는 행성 간 여행도, 수술을 통한 신체 보강도 일상이 된 미래 시대다. 이런 시대에 인간은 기술로 신체를 보강한 ‘인핸서’와 태어난 그대로의 신체를 보강 없이 유지하는 ‘오가닉’으로 구분된다. 인핸서 수술을 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그래서 주인공 ‘뤽셀레’는 유명 예술가 ‘소카’의 집에 청소부로 취직한다.
소카는 심한 폐 질환을 가지고 있다. 그의 집에 들어서는 사람은 모두 현관에서 멸균소독을 거쳐야 하며 집 안 전체에 공기정화 시설이 24시간 돌아간다. 인핸서 수술이 일반적인 시대에 소카가 연약한 몸을 계속 가지고 살아가는 이유는 예술가는 모두 오가닉이어야만 한다는 규정 때문이다. 그는 ‘예술가’라는 공식적인 신분을 유지하고 그에 따라 보장되는 예술 활동을 계속하다 일찍 생을 마감할 것인가, 아니면 예술을 포기하고 삶을 택할 것인가. 쉽지 않은 질문이다.
정보라 소설가중심인물이 화가이기 때문에 작품에는 시각예술에 대한 묘사가 자주 등장한다. 독자는 뤽셀레의 눈으로 소카의 작품을 보게 된다.
‘…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나무였다. 큰 가지에서 뻗어나간 작은 가지들, 거기서 다시 뻗어나간 잔가지들이 마치 자수처럼 대형 캔버스를 촘촘히 메우고 있었다. 그 그물망 같은 가지의 틈에서 내 손톱보다 작은, 셀 수 없이 많은 잎사귀가 점점이 피어나고 있었다.’(116쪽)
뤽셀레는 색을 볼 수 없는 ‘흑백증’ 환자다. 인용문의 미술작품은 색에 따라 나무를 묘사한 작품으로 볼 수도 있고, 다른 어떤 생체조직을 묘사한 작품이 될 수도 있다. 무엇을 묘사한 작품인지는 소설을 직접 읽어보시기 바란다. 나는 이 묘사를 읽으면서 그림을 그리고 싶어졌다. 시각예술에 관심도 재능도 전혀 없지만 이 묘사 때문에 그물망처럼, 자수처럼 촘촘하게 이어진 생명의 잎사귀들을 나도 그려보고 싶었다.
문학 안에서 시각예술 작품을 언어로 생생하게 묘사하는 기법을 ‘엑프라시스(ekphrasis)’라고 한다. 서양 문학에서 가장 유명한 엑프라시스의 예시는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 묘사된 아킬레우스의 방패다. 이런 걸 대학원에서 배우고 근 20년이 지나 ‘빛의 조각들’을 읽으면서 나는 비로소 이해했다.
모든 아름다움은 하나로 연결된다. 숨을 쉰다는 간단하고도 필수적인 행동 자체가 아름다울 수 있다. 그 아름다움을 인간은 신체의 여러 감각을 통해 인식하고 이해하고 묘사한다. 기술이나 시대의 변화와 상관없이 삶과 세상의 아름다움은 언제나 존재하고 인간은 언제나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이런 사실을 연여름 작가가 알려주었다. ‘빛의 조각들’은 그래서 무척 독특하고 매력적인 작품이다. 내가 좋아하는 살인 사건도, 귀신도 없지만 작가는 차분하게 등장인물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여러 삶이 서로 연결되는 모습을 묘사한다. 참고로 ‘에필로그’와 ‘작가의 말’ 뒤에 이스터에그 같은 진짜 에필로그가 숨어 있으니 놓치지 마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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