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6일 프랑스 파리 로댕 미술관은 거대한 꽃의 무대로 변신해 있었다. 천장의 이끼 캐노피에 거꾸로 매달린 수많은 연보라색 실크 꽃들이 산들산들 흔들렸다. 안토니오 비발디의 바이올린 협주곡 ‘사계’ 중 ‘겨울’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디올의 ‘2026년 봄·여름 오뜨 꾸뛰르(최고급 맞춤복)’ 쇼가 시작됐다.
꽃의 향연이었다. 검정, 하양, 주황의 드레스는 왼쪽 어깨 위에 난초과 식물을 드라마틱하게 얹어 조형적 실루엣을 극대화했다. 그리고 바로 이날의 주인공이었던 시클라멘! 깔끔하게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묶은 모델들의 양쪽 귀에는 어른 주먹 두 개 만한 크기의 시클라멘 장식이 달려 있었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시클라멘이 이렇게도 우아하고 미학적일 수 있나.
모든 것은 한 다발의 꽃에서 시작됐다. 지난해 디올의 크리에티브 디렉터가 된 조나단 앤더슨은 이번 쇼를 앞둔 며칠 전 시클라멘이 접시 위에 놓인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제 첫 오뜨 꾸뛰르 쇼를 존 갈리아노에게 가장 먼저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는 친절하게도 검은 실크 리본으로 묶은 시클라멘과 테스코에서 산 케이크를 가져다주었죠. 제가 받아본 꽃 중 가장 아름다운 꽃으로 쇼를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북아일랜드 출신의 앤더슨은 어릴 적부터 디올의 전설적 디자이너 갈리아노를 흠모하며 패션에 대한 꿈을 키웠다. 런던 패션 칼리지를 졸업하고 ‘JW 앤더슨’을 세운 그는 2013년부터 ‘로에베’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아 침체됐던 브랜드를 지적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런 그가 지난해 디올 수장으로 발탁된 후 이번에 선보인 첫 오뜨 꾸뛰르 쇼는 갈리아노에 대한 오마주였다. 갈리아노가 자신의 정원에서 꺾어 후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에게 선물한 시클라멘은 디올의 위대한 유산이기도 했다.
앤더슨이 선보인 스타일은 디올의 아카이브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미래지향적이었다.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볼륨 드레스, 실크 꽃잎과 깃털처럼 층층이 쌓은 오간자 장식이 펼쳐졌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건 디올이 패션쇼가 끝난 후 1주일간 로댕 미술관에서 전시를 이어나가며 공개강연과 학교 투어 프로그램을 제공한 것이다. 오뜨 꾸뛰르를 폐쇄된 특권의 세계가 아니라 공유 가능한 미래 세대의 문화 자산으로 확장하려는 시도가 돋보였다.
전통과 실험, 역사와 현재, 장인정신과 조형적 탐구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디올의 새로운 장이 열렸다. 꽃의 유산이 어떤 미래를 설계할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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