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위 통역이 밝힌 살인사건의 진실[정보라의 이 책 환상적이야]

  • 동아일보

◇통역사/이소영 지음/284쪽·1만6800원·래빗홀


살인 사건이 벌어진다. 남성 피해자와 여성 피해자가 흉기에 찔려 숨졌다. 게다가 둘이 있던 집에는 불까지 났다. 방화다. 이 잔인하고 처참한 현장에서 한 여성이 검거된다. 피투성이로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현행범으로 체포된 여성은 네팔 출신의 결혼 이주민이다. 경찰, 검찰, 법원에 네팔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법원 통역사 장도화는 피해자 측 변호사에게서 허위 통역을 해 주면 거액의 돈을 현금으로 주겠다는 은밀한 제안을 받는다.

어째서? 장도화는 묻지 않는다. 그녀는 암에 걸려 수술을 받고 지금도 약을 먹고 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네팔어 통역 일은 아주 가끔씩만 들어온다. 생존을 위해 그녀는 마트에서 와인을 판다. 월 83만 원 이상 정기적인 수입이 있기 때문에 장도화는 기초생활수급도, 의료비 지원도, 아무런 제도적 도움도 받을 수 없다.

정보라 소설가
정보라 소설가
그러니까 장도화는 제안을 수락한다. 그리고 성실하게(?) 허위 통역을 한다. 네팔인 여성 ‘차미바트’는 자신이 제3의 눈이 열렸고, 그래서 여신이 살인 사건 현장을 목격했다고 말한다. 파란 남성이 칼을 들고 두 남녀를 죽였다고 절규한다. 장도화는 차미바트의 진술을 무시하고 정해진 대본에 따라 통역한다.

그 꾸며낸 통역으로 인해 법정에서 사건은 저열한 치정살인으로 탈바꿈한다. 그러나 장도화는 재판이 끝나고 돈을 다 받고 나서 차미바트를 만나러 간다. 차미바트의 언어, 그 언어가 표현하는 사고방식과 문화와 역사, 개인과 사회의 역사는 장도화 혼자만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장도화는 자신의 몸을 파고든 질병, 자신이 사는 지역, 그 지역의 자연과 환경, 그리고 난데없는 살인 사건이 모두 어떤 배후의 음모로 얽혀 있음을 조금씩 알게 된다.

한 편의 스릴러 영화 같은 작품이다. 박진감과 속도감이 엄청나서 첫 페이지를 펼친 순간부터 집어삼키듯이, 핥아먹듯이 끝까지 다 읽게 된다. 실제로 이소영 작가는 경력 25년의 영화 시나리오 작가이니 흡인력과 몰입도는 보장된 셈이다.

겹겹이 감춰졌던 살인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면서 이야기는 사회 비판과 환경 문제 고발의 양상을 띤다. 그러나 최후의 선악을 판단하는 것은 신의 몫이다. 마지막 처벌을 내리는 것도 신의 역할이다. 결말로 갈수록 (내가 무척 좋아하는) 환상성이 하늘에서 내려와 탐욕과 비리에 찌든 한국 사회를 정죄한다. 무슨 얘기인지는 소설을 읽어 보면 안다.

신이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줄거리를 이끌어 가는 동력원은 주인공 장도화다. 제목에도 나타나듯 사건의 핵심에 있는 인물이 네팔인이라 통역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사건의 양면, 숨기고자 하는 자와 진실을 말하는 자 양쪽의 이야기를 다 듣는 사람은 장도화뿐이다.

장도화는 사건 당사자는 아니다. 그런데 네팔의 사회와 문화를 깊이 이해하고 한국에서 살아가는 네팔인들의 삶과 공동체 내부를 파헤칠 만한 지식과 인맥이 있는 사람도 작중에서는 장도화뿐이다. 작가는 소수 언어 통역사로서 장도화의 이런 복합적인 입장을 매우 능숙하게 활용해 사건을 전개해 나간다.

나도 한국에서 비교적 희소한 언어를 알고 이주민 통역을 해본 적이 있어서 여러 장면에서 깊이 공감하고 감탄하며 읽었다. 그리고 현재 산업단지도 있고 원전 방폐장도 가깝고 지진도 일어났던 지역에서 살기 때문에 소설을 읽으면서 걱정 근심이 깊어지기도 했다. 한국 사회, 노동, 이주민, 환경, 권력과 탐욕의 문제를 흥미진진하게 톺아보고 싶은 분들께 이 책을 권한다. 그리고 현실에서는 이런 무서운 통역을 해야 하는 상황이 누구에게도 닥치지 않기를 기원한다.

#살인 사건#허위 통역#법정 드라마#이주민 삶#권력과 탐욕#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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