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여성의 아픔을 가벼이 본, 의학의 뼈아픈 오진

  • 동아일보

여성 질환보다 남성 질환 먼저 논의
대부분 치료제도 男 중심으로 연구
여성들 난소암 초기에 병원 찾아도
스트레스-위염 등으로 오진 잦아
◇여성의 몸에 대한 의학의 배신/엘리자베스 코멘 지음·김희정, 이지은 옮김/576쪽·2만6000원·생각의힘

남성의 몸을 ‘표준’으로 여겨온 의학사(史) 속에서 여성 질환의 진단과 치료는 오랫동안 주변부로 밀려나 있었다. 종양내과 전문의인 저자는 고정관념을 벗어나 의학의 시야 자체를 확장하자고 제안한다. 게티이미지뱅크
남성의 몸을 ‘표준’으로 여겨온 의학사(史) 속에서 여성 질환의 진단과 치료는 오랫동안 주변부로 밀려나 있었다. 종양내과 전문의인 저자는 고정관념을 벗어나 의학의 시야 자체를 확장하자고 제안한다. 게티이미지뱅크

그녀는 치료가 어려운 유방암 환자였다. 복부에 여러 개의 튜브를 단 채, 지난 6년간 자신을 돌본 주치의와 마지막 작별의 포옹을 나누던 순간. 생의 끝자락에서 그녀가 꺼낸 말은 뜻밖이었다. “선생님께 땀을 흘려서 죄송해요.” 유방암 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종양내과 의사로서 이 환자를 돌봤던 저자는 죽음을 앞둔 순간에 이런 말을 하는 환자의 모습에 깊은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또 다른 환자는 75세였다. 그녀는 유방절제술 흉터 위에 살구색 접착형 유두를 붙이고 진료실에 들어왔다. “흉한 모습을 보여 선생님을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저자가 만난 여성 환자들은 이처럼 땀을 흘려서 미안해하고, 아파서 미안해하며, 심지어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황 자체를 사과했다. 병에 대한 공포심보다 수치심이 앞서는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저자는 이 감정이 개인의 성향이나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 ‘의학적 유산’의 일부일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품었다. 남성의 몸이 ‘표준’으로 설정돼 온 의학사(史) 속에서 여성 질환의 진단과 치료가 주변부로 밀린 역사는 유구하다. 의학 용어부터가 이를 드러낸다. 여성의 외음부를 가리키는 라틴어 ‘푸덴다(pudenda)’는 ‘부끄러워해야 할 물건’이란 뜻이다.

책은 인체를 11개의 개별 기관계(피부계, 골격계, 근육계, 순환계, 호흡계, 소화계, 비뇨기계, 면역계, 신경계, 내분비계, 생식계)로 나누는 의학 교육의 틀을 따라가며, 그 안에 깊숙이 스며든 남성 중심적 가치관을 하나씩 짚어낸다.

가령 난소암은 의학 문헌에서 종종 ‘침묵의 살인마’로 불린다. 상당히 진행된 뒤에야 발견된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난소암 초기 증상을 경험한 대부분의 여성은 병원을 찾는다. 다만 그 호소가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뿐이다. 2022년 부인과 종양학 전문의 바버라 고프가 난소암 환자 1700명을 조사한 결과, 이들 중 15%는 과민성대장증후군, 12%는 스트레스, 9%는 위염, 6%는 변비, 6%는 우울증, 4%는 기타 질환으로 오진됐다. 난소암이 침묵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듣지 못한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을 집필하는 동안 자신 역시 의사로서 비판하려는 시스템 안에 깊이 얽혀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의식했다고 고백한다. 2022년 기준 미국 의대 지원자의 57%는 여성이고, 의료계에서 활동하는 의사의 38%도 여성이다. 하버드대 의대가 1945년까지 여학생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괄목할 만한 변화다. 그러나 의사의 성비가 달라졌다고 해서 의학 자체가 자동으로 달라지는 건 아니다. 많은 치료제가 남성과 여성의 몸에서 다르게 작용함에도, 여성은 오랫동안 연구 대상에서 배제돼 왔다.

이 책은 고정관념을 벗어나 의학의 시야 자체를 확장하자고 제안한다. 여성의 몸에 대한 질문은 흑인의 몸으로, 동양인의 몸으로, 그리고 젊은이의 몸에서 노년의 몸으로 이어질 수 있다. 몸을 바라보는 사고방식 자체를 다시 묻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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