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난 고선경 시인. 그는 “저는 죽어서도 유망주가 되고 싶다”며 “계속해서 기대받고 싶다”고 말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정말 사랑하지 않는다면 쓸 수 없는 게 시 아닐까요? 요즘 세상에 누가 이런 ‘바보 같은 짓’을 해요(웃음)!”
여기, 바보 같은 시 사랑에 ‘올인’하기로 한 젊은 시인이 있다. 다니던 대학원도 관두고 전업 작가로 나섰으니 올인은 결코 비유가 아니다. 2023년 10월 데뷔 시집 ‘샤워젤과 소다수’(문학동네)가 16쇄를 찍으며 일약 시단의 유망주로 떠오른 고선경 시인(28). 1년여 만인 지난달 기세 좋게 새 시집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열림원)을 낸 그를 16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났다.
고 시인에겐 ‘스트릿 문학 파이터’란 별명이 있다. 첫 시집에 수록된 동명의 시에서 유래했다. 댄서 서바이벌 프로그램인 ‘스트릿 우먼 파이터’의 패러디가 분명한 이 시는 댄서 대신 시 습작생을 무대 위에 세웠다.
“세계 최초 시 서바이벌 오디션이 시작됐습니다/지금 바로 투표해주세요”라고 포문을 열더니, 선배 시인 기형도의 ‘엄마 걱정’, 박준의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를 패러디했다. 온라인 커뮤니티의 댓글 형식을 차용하기도 했다.
데뷔작부터 기발한 발상을 보여준 그의 후속작은 의외로 패러디나 밈이 대폭 줄었다. 심경에 변화라도 있었을까.
“데뷔작으로 사랑을 많이 받았지만, 한편으로 ‘얘는 밈이나 패러디 없인 시를 못 쓰냐’는 반응도 있었어요. 그런 것 없이도 시를 쓸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하지만 신작도 특유의 너스레는 여전하다. “미래는 헐렁한 양말처럼 자주 벗겨지지만/맨발이면 어떻습니까?”(시 ‘럭키슈퍼’에서) “떨군 고개를 원래 스트레칭하려 했던 척 한 바퀴/돌리는 것까지가 제 시집의 장기입니다.”(시 ‘도전! 판매왕’에서)
두 번째 시집은 20대 시인이 생각하는 시집의 쓸모, 문학의 쓸모에 대한 고민도 두드러진다. 깔깔 웃는 얼굴 이면의 깊은 속내를 마주한 느낌이다. ‘도전! 판매왕’엔 시인들이 홈쇼핑에 나와 시집을 100초 동안 어필하는 장면이 나온다. 초조하게 차례를 기다리던 ‘나’는 자기 순서가 되자 말을 얼버무린다. “백 초는 너무 길고 시집은 너무 짧다. 그게 이 시집이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이유다.”
고 시인은 ‘내 시를 독자들이 왜 읽어야 할까’란 질문을 내내 마음에 담아뒀던 듯하다. 수록 시 ‘신년 운세’에선 시집을 부적에 빗댔다. “나도 부적 하나 써 줄게/만사형통이나 만사대길 말고//남을 돕는 팔자를 가진 이의 이름 하나 적어 줄게/그러니까 이 시 꼭 사서 간직해/알았지?” 이번 시집은 소소한 행운을 가져다줄 부적처럼 간직할 만하다는 깜찍한 제안. 그럼 어떤 이에게 어울리는 부적일까.
“어떤 종류든 상실을 경험해본 사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기로 한 사람에게 ‘나는 너의 팬이야’라고 말해주는 부적입니다.”
그는 6월 첫 산문집을, 12월에도 또 다른 산문집을 낸다. 내후년까지 출간 일정이 정해져 있다고 한다. 2022년 등단한 시인이 바쁜 나날을 보내는 셈이다. ‘성공 요인이 뭐라고 생각하느냐’고 묻자 그는 정색하며 “알지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다”고 했다.
“우연히 주파수가 맞듯이 제 시가 사람들과 공명할 수 있었지만, 그건 절대로 영원하지 않을 거예요.”
그 대신 “계속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는 게 시인의 포부다.
“무엇보다 ‘이게 성공하는 방법인 것 같아’라고 해서 그것만 밟아 나가는 건 별로 안 멋있지 않나요? 그건 별로 재밌지 않잖아요!”
“미래는 헐렁한 양말처럼 자주 벗겨지지만/ 맨발이면 어떻습니까?” -고선경 詩 ‘럭키슈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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