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림트의 뮤즈, 현실에선 성공한 사업가였다[영감 한 스푼]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1월 10일 10시 06분


구스타프 클림트의 대표작 ‘키스’. 이 작품에서 오른쪽 여성은 에밀리 플뢰게가 모델이라는 추측이 많다. 플뢰게는 클림트가 평생을 같이한 동반자로 알려져 있다. 사진 출처 벨베데레 미술관.
구스타프 클림트 하면 흔히 떠올리는 것이 ‘여인들의 초상화’입니다.

클림트는 의뢰로 사교계 여성을 그리는가 하면, 상징에 빗댄 여자들의 누드를 그리고, 작업실에서는 이런 누드화의 모델을 선 여자들의 적나라한 포즈를 그렸습니다.

생전 클림트는 “나라는 사람은 흥미로울 구석이 하나도 없다”며 “나에 대해 알고 싶다면 그림을 봐달라”며 사생활을 숨기려 했죠.

그러나 수많은 여인을 그림으로 남긴 데다, 세상을 떠난 뒤 ‘숨겨둔 자식’들 10여 명이 유산을 요구하며 나타나 ‘클림트의 여인들’에 대한 관심은 지금도 끊이지 않는 이야깃거리입니다.

오늘은 그 중 평생 클림트와 함께했던 여인이자 ‘키스’의 주인공으로 알려진 뮤즈, 에밀리 플뢰게의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바람둥이’ 클림트 눈 감아준 헌신적 여자?
에밀리 플뢰게가 17살일 때 그린 초상화(1891). private collection
에밀리 플뢰게가 17살일 때 그린 초상화(1891). private collection
클림트와 플뢰게는, 클림트의 동생과 플뢰게의 언니가 결혼하며 사돈 관계로 알게 됩니다.

클림트가 29세 젊은 화가일 때, 17세인 에밀리 플뢰게의 초상을 그렸는데, 가족이나 주변 사람을 모델로 흔히 그림을 그렸던 시기입니다.

이후 클림트 형제들은 중요한 그림 커미션을 따내며, 그림 사업을 확장합니다. 플뢰게 자매 역시 ‘슈베스턴 플뢰게(플뢰게 자매라는 뜻)’라는 이름으로 패션 디자인을 시작해, 두 가문이 사업적으로 도움을 주고받았습니다.

그러다 에른스트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클림트가 조카의 후견인이 되면서 에밀리 플뢰게와 구스타프 클림트는 가까워집니다.

두 사람은 빈의 사교 행사에 자주 함께했고, 사람들은 플뢰게를 ‘클림트 부인’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클림트가 죽을 때까지 둘은 결혼하지 않았고, 같이 살지도 않았습니다. 클림트는 어머니와 여동생, 누나들이 함께 살며 뒷바라지했고, 플뢰게도 언니, 동생 및 가족과 함께 살았죠.

이 때문에 예전의 클림트 전기에서는 플뢰게와 클림트가 ‘사랑의 결실을 맺지 못했다’거나, 플뢰게가 ‘바람둥이 클림트’를 눈 감아준 헌신적 여자로 묘사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미술사학자들은 가부장적 시각에서 벗어나 플뢰게의 삶을 돌아보고 있는데요. 클림트의 모델, 뮤즈라는 렌즈를 버리고 플뢰게의 삶을 보면 그녀 자체로도 성공한 사업가이자 시대를 앞서갔던 디자이너였음이 드러납니다.

‘슈베스턴 플뢰게’ 전성기엔 직원 80명
구스타프 클림트가 그린 19세일 때 에밀리 플뢰게. 알베르티나 미술관 소장.
구스타프 클림트가 그린 19세일 때 에밀리 플뢰게. 알베르티나 미술관 소장.
클림트는 평생 플뢰게의 초상을 4차례 그렸는데, 여기서도 플뢰게의 변화를 엿볼 수 있습니다. 17, 19세 때 초상에서 플뢰게는 얌전한 드레스를 입고 있습니다. 19세 때 초상은 아름다운 정원과 공주풍 드레스가 눈길을 끌지만, 플뢰게의 포즈와 표정은 어색한 듯 경직되어 있죠.

구스타프 클림트 ‘에밀리 플뢰게 초상’(1902). Wien Museum Inv.-Nr. 45677, CC BY 4.0, Foto: TimTom, Wien Museum (https://sammlung.wienmuseum.at/en/object/820521/)
9년 뒤인 1902년. 완전히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다부진 입은 그대로지만 ‘비엔나 공방’ 디자이너들이 즐겨 사용했던 패턴의 원피스를 입고 턱은 약간 위로 든 모습이 자신감 넘칩니다.

플뢰게가 입고 있는 옷은 당시에는 호불호가 갈리는, 낯선 스타일이었습니다. 허리가 조이지도 않고 패턴도 여성적 드레스에서는 잘 쓰이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이죠.

특히 영국에서 빅토리아 시대 여성의 신체를 과도하게 억압하는 옷을 바꾸자는 페미니즘 운동에서 시작한 ‘개혁 드레스’(Reform Dress)의 영향도 보입니다.

이런 옷을 좋아하는 건 지성인과 아방가르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었죠. 플뢰게 자매들은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1904년 빈에 패션 상점 ‘슈베스턴 플뢰게’를 열고 이런 옷을 만들었습니다.

직접 디자인한 옷을 입고 있는 에밀리 플뢰게. 사진 출처 구스타프 클림트 재단.
재밌는 건 클림트의 그림이 보여준 새로운 시도를 플뢰게 자매가 패션의 영역에서 보여주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매년 프랑스와 런던을 방문했던 플뢰게는 폴 푸아레에게 영감을 얻었고, 또 클림트와 절친했던 비엔나 공방 디자이너, 건축가와도 활발히 협업했습니다.

이때 슈베스턴 플뢰게에 가면 비엔나 공방 스타일 인테리어에 콜로먼 모저가 디자인한 가구가 놓여 있고, 또 각종 실험적인 공예품들이 비매용 장식품으로 진열되며 세련된 취향과 감도를 자랑했습니다. 유럽의 도버 스트릿 마켓 같은 ‘편집샵’의 초기 형태를 보여줬다는 평가도 받습니다.

슈베스턴 플뢰게에서 콜로먼 모저가 디자인한 의자 옆에 서 있는 에밀리 플뢰게. 사진 레오폴드 미술관
슈베스턴 플뢰게에서 콜로먼 모저가 디자인한 의자 옆에 서 있는 에밀리 플뢰게. 사진 레오폴드 미술관
그러면서 비엔나 공방 스타일을 낯설어하는 고객에겐 여전히 귀부인 스타일의 옷을 제작해 주면서 수익을 내는 수완도 갖췄습니다. 덕분에 슈베스턴 플뢰게는 전성기에 직원을 80명까지 두었고, 1차 세계대전 뒤에도 큰 타격을 입지 않았고, 나치의 유대인 핍박으로 문을 닫기 전에 30년 넘게 영업을 이어 갔다고 합니다.

‘감각의 파트너’ 클림트를 사랑하다
벨베데레 미술관이 대표 소장품 ‘키스’와 에밀리 플뢰게를 스타일을 재현해서 만든 전시 홍보 사진.. 사진 벨베데레 미술관 제공
이렇게 플뢰게가 성공한 사업가였음을 주목한 독일 미술사학자 수자나 파르치는 “플뢰게가 클림트를 위해 ‘자기희생’(self-sacrifice)을 하고 눈 감아준(renunciation) 존재로 묘사하는 것은 그녀가 자기 사업과 커리어를 갖고 있었다는 점에 비춰보면 부적절하다”“플뢰게가 클림트로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했음을 감안하면 각자를 존중하는 파트너십은 그녀에게도 득이 됐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클림트는 자신에게 초상을 의뢰하는 부유한 중산층 고객을 플뢰게에 소개하며 도움을 주었고, 디자인에 관해서는 서로 의견을 공유하고 직접 옷을 함께 만들기도 했습니다. 또 두 사람은 매년 여름 함께 휴가를 떠났는데, 이곳에서 플뢰게가 새롭게 디자인한 옷을 입고 홍보용 사진을 찍을 때, 대부분은 클림트가 찍어줬습니다.

클림트가 찍어준 에밀리 플뢰게 사진. 레오폴드 미술관 소장
클림트가 찍어준 에밀리 플뢰게 사진. 레오폴드 미술관 소장
1980년대에는 클림트가 플뢰게에 보낸 엽서 400장이 발견됐는데, 그중에는 이런 내용도 있었습니다.

“파리에 와보니 이곳 사람들은 더 과감한 스타일의 옷을 입고, 누구도 이상한 시선으로 보지 않아. 당신이 파리를 무척 좋아했을 것 같아.”

그러다가 플뢰게가 시장 조사를 위해 해외로 떠나면 클림트는 “미디(에밀리의 애칭), 왜 그렇게 빈을 빨리 떠났어? 파리에 그렇게 급하게 가야만 했던거야?”하고 묻거나, 자신이 빈을 떠났다가 돌아올 때는 “내 귀여운 미드리첸, 미데사, 미디(에밀리의 애칭들)에게 돌아갈 생각을 하니 너무 기뻐. 그녀가 기차역으로 마중을 나올까? 어쨌든 돌아가면 만나게 될 테니까”하고 애정 표현을 했습니다.

클림트가 세상을 떠날 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에밀리를 불러줘’였고, 유산 절반을 그녀에게 남겼다고 하죠. 이 유산 대부분은 미완성 작품, 그림, 드로잉이었는데 플뢰게는 개인적으로 의미있는 작품과 소장품을 팔지 않고 자택에 ‘클림트의 방’을 만들어 보관했다고 전해집니다.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밀리 플뢰게. 사진출처 구스타프 클림트 재단
클림트의 복잡한 관계를 다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회화와 디자인에서 ‘새로움’을 찾으려 했던 꿈과 희망이 두 사람을 강하게 연결해 준 고리가 아니었을까. 또 한 사람의 일방적 희생이 아니라 각자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하며 ‘감각의 파트너’로 함께한 것이 오랜 시간 애정을 지키게 해주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 ‘영감 한 스푼’은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술계 전반의 소식을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매주 목요일 아침 7시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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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 한 스푼#구스타프 클림트#에밀리 플뢰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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