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봄’ 미국은 왜 전두환을 용인했나[김상운의 빽투더퓨처]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1월 22일 11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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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12·12 쿠데타와 한미관계

최근 영화 ‘서울의 봄’ 흥행을 계기로 전두환의 12.12 군사쿠데타를 왜 막지 못했는지에 대한 여러 궁금증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당시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쥐고 있던 미국이 쿠데타를 막으려고 했는지, 그렇지 않았다면 왜 그랬는지에 대한 의문도 포함돼 있죠.

이는 쿠데타에 이어 이듬해 벌어진 5.18 광주 민주화운동과 연결되는 민감한 사안입니다. 한미관계의 일대 전환이 이뤄진 당시로 시계를 돌려보겠습니다(윌리엄 글라이스틴 전 주한 미국대사 회고록 등 국내외 주요 문헌을 참고했습니다.)

美, 반란군 무력 대응에 부정적
1985년 4월 미국을 방문한 전두환 대통령이 레이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마친 뒤 포옹하고 있다. 전두환 정권은 미국의 지지를 얻기 위해 박정희 정부 때 추진한 핵무기 개발 계획 등을 포기했다. 동아일보DB
12.12 당시 미국의 움직임에 대해선 ①미국은 쿠데타를 사전에 인지했지만 전두환 신군부를 도와줬다 ②미국은 쿠데타를 예상하지 못했고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신군부를 견제하려고 했다는 상반된 주장이 있습니다.

①은 주로 국내 일부 학자들이, ②는 미국 정부의 공식 입장으로 각각 제기됐죠. 각자 자신의 시각과 관점에서 현상을 바라보니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40여 년 동안 공개된 자료들이 가리키는 그날의 진실은 무엇일까요.

미국 정부를 대표하는 한국 내 양대 축인 주한 미국대사와 주한미군사령관의 증언부터 살펴봐야겠습니다. 우선 사전 인지 여부에 대해선 존 위컴 주한미군사령관이 1999년 펴낸 자신의 회고록(Korea on the Brink: From the 12/12 Incident to the Kwangju Uprising, 1979-1980)에 비교적 자세히 기록을 남겨놓았습니다.

이에 따르면 위컴은 1979년 11월 말~12월 초 이형근 당시 합참의장으로부터 “육사 11기와 12기가 주축이 된 소장파 장성들이 현재의 상황과 정치인들에 대해 극도의 불만을 갖고 소요(unrest)와 반란을 조장하고 있다. 대통령 선거 전에 권력쟁취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는 겁니다.

위컴은 이 정보를 12월 4일 노재현 국방부 장관과 이후 유병현 연합사 부사령관에게 전달했지만, 한국 정부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마도 위컴이 정보를 취득한 11월 말과, 이를 노재현 장관에게 전달한 12월 4일 사이에 본국에도 이를 보고했을 겁니다(노 장관에게 정보를 전달한 것도 본국 지시에 따른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쿠데타 발생 가능성을 인지한 미국은 12월 12일 당일 어떻게 대응했을까. 이날 밤 공교롭게도 노재현 국방장관은 미 8군 벙커로 피신해 위컴과 함께 있었습니다. 한국군 최고 지휘부와 작전통제권을 쥔 미군 지휘부가 한 자리에 있었던 거죠. 두 사람이 그 시각 신군부에 어떻게 대응했느냐에 따라 쿠데타의 향방이 바뀔 수도 있었던 중요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무력 대응에 일체 나서지 않습니다.

특히 진압에 나선 장태완 수도방위사령관이 이건영 3군 사령관에게 동원을 요청한 수도기계화사단과 26보병 사단은 한미연합사령관인 위컴의 작전통제권 하에 있는 부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위컴은 “아직 어둡기 때문에 진압군과 반란군 간 오인충돌이 불가피하다”며 노재현 장관에게 부대 이동을 허가하면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노태우가 전방의 9사단을 무리하게 서울로 진입시킨 상황에서 이런 결정을 내린 건 미국이 애초부터 신군부를 진압할 의사가 없었음을 보여준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죠.

1979년 12.12 군사 쿠데타 당시 반란군의 작전 상황도 동아일보DB
그렇다면 미국은 결정적 순간에 왜 반란군 진압을 만류했을까요. 이에 대해 글라이스틴은 회고록에서 남한의 혼란을 틈탄 북한군의 남침 가능성과 5.16 군사쿠데타의 기억이라는 두 가지 이유를 들고 있습니다.

그는 “12일 밤과 13일 새벽 북한을 자극할 한국군 간의 충돌과, 민간 정부가 전복돼 한국의 정치적 자유가 무산되는 것 두 가지를 방지하는 데 우선 순위를 두었다. 그러나 둘 중에서도 전자를 특별히 경계했다”고 썼습니다. 다시 말해 남한 군부의 내전을 틈탄 북한군 남침과, 쿠데타에 따른 민주정 붕괴를 막는 게 미국의 목표였지만 무엇보다 안보 위협을 제거하는 게 최우선이었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민주정을 지키려면 반란군을 무력으로 진압할 수밖에 없기에 이 두 가지 목표는 서로 상충될 수밖에 없었죠. 결국 당시 미국은 도덕외교 원칙에서 늘 강조하는 ‘민주 가치’를 포기하고 ‘안보 이익’을 택한 겁니다.

사실상 12.12 쿠데타 이전부터 미국의 안보 우려는 팽배한 상태였습니다. 1970년대 미중 데탕트로 양국은 한반도 현상유지에 합의했지만, 북한은 이런 구도를 깨기 위해 1976년 판문점 도끼 만행사건 등을 벌이죠. 이런 가운데 10.26 사태가 터지자 미국은 이틀 뒤 ‘날아다니는 전투지휘사령부’로 불리는 AWACS(공중조기경보통제기) 2대와 키티호크 항공모함 등을 한반도로 급파하는 등 대북경계에 적극 나섭니다.

글라이스틴이 북한군 남침 우려와 더불어 5.16 군사쿠데타의 기억을 꺼내든 건 당시 미국의 공개적인 반대가 박정희 정권 내내 한미관계가 불편했던 요인이었음을 언급한 겁니다. 5.16 쿠데타 발생 직후 매그루더 미 8군 사령관과 그린 주한미국 대리대사는 “유엔군사령관의 권한 아래 있는 모든 군인들이 장면 총리가 이끄는 한국 정부를 지지할 것을 요청한다”는 성명을 발표했었죠.

도덕주의에서 현실주의 외교로 급선회한 미국
1979년 방한한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오른쪽)이 박정희 대통령과 3군 사열을 받고 있다. 카터 행정부는 인권 향상을 요구하며 박정희 정부를 강하게 압박했다. 동아일보DB
12.12 쿠데타 발생 당시 미국의 카터 행정부는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도덕주의 외교 원칙을 내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카터 행정부가 한반도에서 안보 이익을 최우선으로 전두환 신군부를 사실상 용인한 건 선뜻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왜 이런 상황이 벌어진 걸까요. 먼저 10.26 사태 전 한미관계를 돌아보죠.

“우리는 민주적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것을 믿고, 부도덕한 방법을 동원하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공산주의에 대한 터무니 없는 공포 때문에 우리 편에 서기만 하면 어떤 독재자도 받아들이던 관행에서 벗어날 것이다.”(1977년 지미 카터의 대통령 취임 연설)

카터 대통령은 반공을 표방한 동맹국이라도 인권을 탄압하는 권위주의 정부를 옹호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습니다. 민주와 인권을 강조하는 카터의 도덕외교 원칙은 독실한 기독교인이던 그의 철학에서 비롯된 측면도 있지만, 미국 외교전통의 영향이 컸습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떠난 청교도 정신이 ‘미국 예외주의(American exceptionalism)’로 발현되면서 민주주의 가치를 관철해야한다는 도덕주의 외교가 미국의 1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이어지기도 했죠(12회 <키신저의 ‘현실주의 외교’가 남긴 것들> 참고·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231210/122564144/1) 여기에 닉슨의 워터게이트 사건과 베트남전 패전을 계기로 미국이 도덕주의로 회귀해야한다는 여론이 조성된 것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카터의 도덕주의 외교 방침은 수사에 그친 게 아니라 실제 정책으로 구현됐습니다. 미국은 1979년 카터 방한을 앞두고 구체적인 인권 향상 조치를 박정희 정부에 요구하죠. 이에 따라 주한미군 철수를 지렛대로 한국 정부로부터 6개월간 180명의 양심수를 석방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냅니다. 또 한국의 인권 상황이 개선되기 전까지 국제금융기구의 차관 제공을 중단하겠다고 압박합니다. 급기야 그해 10월 5일에는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를 본국에 소환하는, 전례 없는 결정을 내리기에 이릅니다. 이 같은 미국의 전방위 압박은 군사독재를 반대한 국내 재야세력의 호응으로 이어집니다.

1979년 이란 인질 사태 당시 수도 테헤란의 미국 대사관에 난입하고 있는 과격파 학생 시위대. 위키피디아 제공
그런데 이 같은 워싱턴의 분위기는 10.26 직후 발생한 1979년 11월 ‘이란 인질 사태’로 급변합니다. 그해 이란 혁명으로 집권한 호메이니가 이슬람 정부를 세운 뒤 반미주의를 앞세워 미국 외교관들을 억류한 사건입니다. 중동에서 극렬한 반미정권의 급작스런 등장에 강력한 대응을 촉구하는 현실주의 외교가 미국 외교가에서 득세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중동에서 주요 동맹을 잃은 상황에서 동아시아에서 공산진영에 맞서는 한미동맹마저 위태롭게 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팽배해집니다. 1979년 12월 27일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한반도를 안정적으로 관리해야한다는 현실주의자들의 목소리가 커지는 배경이 되죠. 이것이 1979년 12월 4일 리처드 홀브룩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가 글라이스틴에게 “한국이 제2의 이란이 되지 않도록 필요한 조치를 강구하라”며 한국 정부의 안정을 강조한 배경입니다.

미국은 12.12 쿠데타 이후 과거 남미 국가들처럼 ‘역 쿠데타’가 발생해 남한의 정치 불안이 가중될 가능성도 우려하죠. 실제로 위컴은 1980년 1월 말 역 쿠데타를 모의하던 한국군 장성의 지원 요청을 받았지만 이를 거절했다고 증언했습니다. 남한 군부의 내전을 막으려면 기왕에 성립된 전두환 체제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게 미국의 판단이었습니다.

이 같은 미국의 입장은 12.12 쿠데타에 이어 이듬해 5월 발생한 광주 민주화운동에서도 유지되면서 한국에서 반미주의가 폭발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예를 들어 5월 27일 신군부의 계엄군 투입을 닷새 앞둔 22일 백악관 회의에서 에드먼드 머스키 국무부 장관과 해럴드 브라운 국방부 장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백악관 국가안보담당 보좌관은 한국 내 질서 회복이 시급하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한국에서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외교적 압력은 정치질서가 회복된 후에나 진행하자는 거였죠.

체제안정을 최우선으로 한 미국의 대한(對韓) 정책이 바뀐 건 1987년 민주화 국면이 도래한 이후였습니다. 당시 야권의 직선제 개헌이 전 국민적 호응을 얻자, 릴리 주한 미국대사가 김영삼 당시 신민당 고문을 공개적으로 만나는 등 야당에 힘을 실어줬습니다. 무엇보다 전두환 정권의 계엄군 투입 움직임을 사전에 포착한 미국 정부가 이를 철회시키기 위해 전방위 압력을 가합니다. 결국 안팎의 거센 반발에 직면한 전두환은 계엄령 선포를 포기하고,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기에 이르죠.

지금까지 12.12 군사쿠데타 전후 미국의 대한국 정책이 이란혁명과 소련의 아프간 침공 사태 등을 계기로 도덕주의에서 현실주의로 선회한 과정을 자세히 살펴봤습니다. 이 같은 변화는 미국이 쿠데타 대응 과정에서 민주주의 가치보다 안보이익을 추구해 신군부의 집권을 사실상 용인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그러나 이는 광주민주화운동과 맞물려 한국에서 반미주의를 폭발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1987년 민주화 국면에서는 미국이 전두환 정권의 직선제 개헌을 압박하는 행태로 이어지죠. 사실 미국은 전두환 집권으로 반미주의라는 커다란 부담을 안게 되지만, 전두환의 집권을 인정해주는 대가로 박정희 정부가 비밀리에 추진한 핵무기 및 장거리 미사일 개발을 포기시키는 성과를 거두게 됩니다. 북한의 침략을 막고 경제 번영을 가능케 한 한미동맹의 이면에는 철저한 국익 중심의 현실주의 외교가 자리 잡고 있음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참고 문헌]
-박원곤 <1979년 12.12 쿠데타와 카터 미 행정부의 대응: 도덕외교의 타협> (2010년, 국제정치논총 50집 4호)
-정일준 <전두환 노태우 정권과 한미관계: 광주항쟁에서 6월 항쟁을 거쳐 6공화국 등장까지> (2010년, 역사비평)
-이흥환 <전두환, 정권 승인 대가로 美에 핵포기, 전투기 구매 약속> (2004년, 신동아)

“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온라인 뉴스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에서 하나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학술 담당으로 역사 분야를 여러 해 취재한 기자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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