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무능하다”는 강박, ‘불행한 완벽주의자’ 만든다 [최고야의 심심(心深)토크]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2월 16일 14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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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완벽주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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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들지 않아 고치고 또 고치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훌쩍…. 완벽주의 성향인 사람들은 같은 일을 해도 남들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쏟다가 지쳐버리는 경우가 많다. 잘하고 싶은 강박에 시달리며 우울증이나 번 아웃을 겪기도 한다. 이들은 왜 이렇게 피곤하게 사는 걸까. 게티이미지뱅크
마음에 들지 않아 고치고 또 고치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훌쩍…. 완벽주의 성향인 사람들은 같은 일을 해도 남들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쏟다가 지쳐버리는 경우가 많다. 잘하고 싶은 강박에 시달리며 우울증이나 번 아웃을 겪기도 한다. 이들은 왜 이렇게 피곤하게 사는 걸까. 게티이미지뱅크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하는 것은 내게 매우 중요하다.
어떤 일을 시작하고 나면, 끝마칠 때까지는 쉬지 않는다.
내가 일을 훌륭히 못 해내면 사람들은 나를 형편없다고 볼 것이다.
스스로 더 나아지려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화가 난다.
(‘다차원적 완벽주의’ 질문지의 일부)

‘이거 다 내 얘긴데?’란 생각이 든다면, 평소 남들과 같은 일을 해도 유독 피곤하고 에너지 소모가 많진 않았는지 돌아보자. 이런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사소한 일에도 완벽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실패하면 어떡하지?” “이것도 제대로 못 하다니 난 무능해” “잘해서 인정받아야만 해” 같은 생각이 따라다녀서 그럴 가능성이 크다. 심리학에선 이를 ‘부적응적 완벽주의’라고 부른다.

사실 완벽주의는 나쁜 게 아니다. 완벽해지기 위해 쏟는 노력은 성취와 성공의 큰 동력이 된다. 다만 실패를 지나치게 두려워하고, 못난 자신을 강하게 질책하며, 성공하더라도 만끽하지 못하고, 평가가 두려워할 일을 미루는 등 여러 부작용이 따를 때 문제가 된다. 모든 일을 잘하려고 하니 두통이나 근육 긴장 등은 일상이다. 불안이나 강박, 우울증, 번아웃 등의 증상도 완벽주의자에게 흔히 나타난다. 무대 공포증이나 공황장애를 겪기도 한다. 어떻게 해야 불행한 완벽주의를 내려놓고, 행복한 완벽주의자로 거듭날 수 있을까.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10여 년 전 방영된 한 KBS ‘개그 콘서트’에서 우리 사회를 풍자하며 나온 유행어다. 1등이 아니면 기억되지 못하고, 그저 그런 인생으로 여겨진다고 해서 해당 코너의 이름도 ‘나를 술 푸게 하는 세상’이었다. 전교 1등과 명문대 의대 진학에 집착하다 파국으로 치닫는 이야기를 다룬 2019년 jtbc 드라마 ‘스카이캐슬’에서도 성공에 집착하는 한국의 능력주의 문화를 꼬집기도 했다.

드라마 ‘스카이캐슬’에서 명문대 의대 입시에 집착하던 강예서(김혜윤 분)는 과도한 스트레스와 강박에 시달린다. jtbc
드라마 ‘스카이캐슬’에서 명문대 의대 입시에 집착하던 강예서(김혜윤 분)는 과도한 스트레스와 강박에 시달린다. jtbc
잘해야만 인정받는 강박적 사회 분위기에서 완벽주의자가 많은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연세대 상담심리 연구실에서 성인 511명을 대상으로 완벽주의 검사를 실시한 결과 무려 53.6%가 완벽주의 성향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명 중 1명은 완벽주의자란 얘기다. 한 취업포털 사이트에서 진행한 또 다른 설문조사에서는 스스로 완벽주의자라고 생각하는 직장인이 70% 가까이 된다는 결과도 있었다.

그런데 이들 중 상당수가 앞서 말한 부적응적 완벽주의, 즉 ‘불행한 완벽주의자’라는 것이 문제다. ‘네 명의 완벽주의자’와 ‘나는 왜 꾸물거릴까?’를 집필한 이동귀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완벽주의 성향의 사람들 가운데 우울과 불안 등을 호소하는 불행한 완벽주의자는 약 70% 정도”라며 “나머지 30%만이 실패하더라도 부정적인 감정을 잘 조절하고, 실패를 배움 삼아 더 나은 모습으로 발전하는 ‘행복한 완벽주의자’가 된다”고 말했다.

●완벽주의자의 잘못된 사고
·목표 달성 조건에 ‘반드시’ ‘기필코’ ‘절대’ 등이 붙는다.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하고, 아니면 안 하는 게 낫다.
·완벽하지 않은 결과는 전부 실패한 것이다.
·한 번 실수하면, 앞으로도 계속 안 좋은 평가를 받을 것이다.
·노력했는데도 실패하면 나라는 사람 자체가 실패한 것이다.
불행한 완벽주의자들은 비현실적으로 높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 ‘1등 해야만 한다’ ‘모두에게 인정받아야만 한다’ ‘언제나 잘 해내야만 한다’ 등 강박적인 목표가 대부분이다. 애초부터 목표 자체가 비현실적이었기에 실패로 이어지기 쉽다.

그런데 불행한 완벽주의자들은 자신이 못나고 한심해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라는 사람 자체, 인생 전체의 실패로 확대 해석하며 괴로워한다. 그리고 앞선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더 견고하고 높은 목표를 세우고, 한심한 자신을 더욱 강하게 채찍질한다. 언뜻 보기에도 굉장히 비합리적이고 억지스럽게 느껴지지만, 완벽주의자들에게는 이런 생각이 굉장히 자동적이고 빠르게 일어난다.

부모의 성공 강요…불행한 자녀 만든다
부모에게 인정받으려다 완벽주의 성향이 생겼다면, 실패를 과도하게 두려워하며 자기 비난을 하기도 한다. 게티이미지뱅크
부모에게 인정받으려다 완벽주의 성향이 생겼다면, 실패를 과도하게 두려워하며 자기 비난을 하기도 한다. 게티이미지뱅크

“성적 올려야 해” “좋은 대학 가야 해” “좋은 회사 취업해야 해” 등 타인에게서 강압적으로 완벽을 요구받으며 자랐다면 불행한 완벽주의자가 되기 쉽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사회부과 완벽주의’라고 한다. 용어가 생소하지만, 말 그대로 부모나 교사 등 사회적 대상으로부터 강요당한 완벽주의라는 의미다.

●완벽주의의 여러 가지 특징들

사회부과 완벽주의
·내가 실수했을 때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매우 실망할 것이다.
·우리 가족은 내가 완벽하기를 기대한다.

자기지향 완벽주의
·나는 나 자신에게 높은 기준을 세운다.
·나는 학업이나 그 밖의 일에서나 항상 성공해야만 한다.

타인지향 완벽주의
·나와 가까운 사람들이 실수하는 것을 보면 참을 수가 없다.
·내가 누군가에게 무엇을 부탁한 경우, 그 일이 완벽하게 되어있기를 기대한다.

출처: ‘다차원적 완벽주의’ 척도 중 일부
특히 학구열이 강한 우리나라에서는 완벽주의를 강요받은 학생들의 불안감이나 번아웃 등과 관련한 연구가 많이 이뤄지고 있다. 이상민 고려대 교육학과 교수 연구팀이 서울 소재 대학생 326명을 대상으로 완벽주의 성향이 학업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조사했다. 그 결과 사회부과 완벽주의 성향을 가진 학생들은 시험 보기 전에 크게 불안해했고, 공부 영역에서 번아웃을 겪는 것으로 나타났다. 주변에서 공부하라고 압박할수록 불안감은 더 커졌다.

안타까운 점은 그렇다고 이들의 성적이 좋지도 않다는 것이다. 또 다른 국내 연구에 따르면, 부모를 실망하게 할까 봐 걱정이 많은 학생들은 시험 전후에 느끼는 불안감 정도가 매우 높았고, 실제 시험 성적도 좋지 않았다.

흥미·열정 잃고 번아웃 겪기도
다른 사람의 높은 기준에 맞추려는 노력이 번아웃을 부르는 것은 학업뿐 아니라 스포츠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운동선수들도 이 때문에 운동에 흥미를 잃고 슬럼프를 겪는다. 게티이미지뱅크
다른 사람의 높은 기준에 맞추려는 노력이 번아웃을 부르는 것은 학업뿐 아니라 스포츠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운동선수들도 이 때문에 운동에 흥미를 잃고 슬럼프를 겪는다. 게티이미지뱅크

이런 영향은 공부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다. 매일매일 기록으로 평가받는 스포츠 영역에서도 심심치 않게 나타난다. 남이 억지로 주입한 완벽주의는 그나마 있던 흥미도 떨어트리고, 재능을 허비하게 만들기도 한다. 부모나 코치 등 다른 사람에 인정받으려고 하면서 결과적으로 잘하고 싶다는 내적 동기는 사라지고 열정을 잃게 되는 것이다.

영국 베드퍼드셔대 연구팀은 축구, 테니스 등 종목에서 우수 인재로 평가받는 11~21세 남성 운동선수 201명을 대상으로 완벽주의 성향을 조사했다. 이들 가운데 사회부과 완벽주의 성향이 있는 선수들은 운동에 흥미를 잃고, 번아웃을 겪을 확률이 높았다. 연구팀은 “운동선수의 특성상 매일 신체적인 한계에 도달할 때까지 고된 훈련을 하는데, 좋은 결과를 내야만 인정받을 수 있다는 심리적 압박감이 더해지면서 번아웃을 겪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평가가 무서워” 도망치고 미루기
다른 사람의 평가에 예민한 특성은 일을 미루고 꾸물거리는 습관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 역시 사회부과 완벽주의 성향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다른 사람의 평가에 예민하기에 실패할까 봐 큰 두려움을 느끼게 되고, 일을 시작할 엄두를 못 내는 것이다.

그러면서 시작도 못 하는 자신을 멍청하고 한심하다고 아주 심하게 자책한다. 안 그래도 스스로를 혼쭐내고 있는데, 옆에서 “빨리 좀 하라”고 쪼아대기라도 하면 더 크게 낙심한다. 이동귀 교수는 “본인은 별로 완벽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는데, 다른 사람들의 기준에 맞추며 살다 보니 뼛속까지 완벽주의 기준이 부여 된 경우 미루는 습관이 생길 수 있다”며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통제할 수 없이 커지면 우울, 무기력함으로 이어진다”고 했다.

●꾸물거림의 발단이 되는 개인 특성

·꾸물거리는 자신의 모습이 실망스러워 스스로를 심하게 책망하곤 한다.
·“나는 잘 해내지 못하는 사람이야. 난 쓸모가 없어” 같은 생각을 자주 한다.
·우울해져서 또 일을 미루게 된다.
·“뛰어나게 잘하고 싶다”와 “실패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늘 공존한다.
·직접 통제할 수 없는 부분(예: 동료의 행동, 상황적 우연)까지 통제하려다가 스트레스를 받는다.
·타인의 부정적인 평가에 대한 걱정 때문의 일의 진행이 느려진다.

출처: 책 ‘나는 왜 꾸물거릴까?’(21세기북스)
안타까운 사실은 이들이 심각한 악순환에 갇히게 된다는 것이다. 잘해야만 한다는 생각 때문에 일을 시작할 엄두를 못 내고, 그러면 자신을 한심하다고 비난하고, 우울하고 무기력해져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또 그런 자신을 질책하며 아무것도 못 하는 상황이 무한 반복된다.

누구에게 인정받고 싶은가?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는 “잘해야만 한다”는 목소리가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알아야 한다. 지나치게 실패를 두려워하는 성향이 누군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비롯된 건 아닌지 돌아보는 것이다. 이때 인정받고 싶은 사람은 부모, 선생님, 상사, 배우자 등 다양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인정을 갈망하며 사는 사람은 그 과정에서 아무리 노력을 많이 했더라도, 타인에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면 만족감을 느낄 수 없다.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정말 나 자신을 위해 잘하려고 노력하는 것인가?’라고 자문해야 한다. 누군가에게 환영받고, 사랑받지 못하는 존재가 될까 봐 두려운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자. 이 교수는 “그렇다고 완벽주의 성향을 100% 다 버리라는 것이 아니다. 그동안 완벽주의 성향이 분명히 삶에 도움이 되는 부분이 있었을 것”라며 “적어도 나를 힘들게 만드는 타인의 목소리를 구분해 낼 줄 아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다음 주 기사에서는 △대물림 되는 완벽주의 성향 △행복한 완벽주의자로 키우는 칭찬법 △완벽주의를 삶의 무기로 활용하기 등에 대해 다룰 예정입니다. 

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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