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청으로 탄생한 신화 속 코끼리[전승훈의 아트로드]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2월 1일 11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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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덕 단청 초대전 ‘철없는 코끼리’

스리랑카 남부 카나에 있는 핀나웰라 코끼리 고아원(Pinnawela Elephant Orphanage)은 1975년 야생동물 보호국에 의해 세워진 코끼리 보육원이다. 마하 오야강 주변에 25에이커에 이르는 코코넛 수목림 일대에 자리 잡고 있는 이 곳은, 대부분 병들어 죽거나 버림받은 어린 코끼리와 밀렵꾼에 의해 상해를 입은 코끼리 약 90여 마리가 살고 있는 보금자리다.


2019년 4월21. 불교미술과 단청(丹靑) 예술 전문 작가인 박근덕 작가는 생일을 기념해 친구와 함께 스리랑카로 배낭 여행을 떠났다. 그는 핀나웰라 코끼리 고아원에서 코끼리들이 하루에 두번씩 냇가로 수영을 하러가는 장면을 보게 됐다고 한다. 철창이나 울타리도 없는 숲 속에서 100마리 가까운 코끼리가 자유롭게 냇가로 걸어가는 모습은 마치 ‘신화의 세계’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고 한다. 그는 정글 속에서 코끼리를 가까이 바라보고 만지며 너무나 신비스럽고 특별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박근덕 단청 작가

그런데 마침 그날. 스리랑카 수도 콜롬보에서는 ‘부활절 테러’가 일어나 약 300명 가까이 목숨을 잃은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이륜차를 개조한 교통수단인 툭툭 운전사가 박 작가에게 페이스북에 올라오는 사진을 보여주었다. 모자이크 처리도 없이 사람들이 피흘리며 쓰러져 있는 사진들이었다. ‘뭐 별일 있겠어?’하는 마음으로 그가 시내에 도착하니, 마치 영화 촬영을 끝낸 세트장처럼 도시는 텅 비어 있었다. 게다가 갑자기 날이 어두워지고, 세찬 비까지 내렸다. 멍하니 길을 걷다보니 지나가는 툭툭 운전사가 ‘빨라 숙소로 가라. 절대 길거리로 나오지 말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당시에 콜롬보에는 교회와 성당, 호텔 등 6군데 정도에서 폭탄이 터졌는데, 외국인들을 타켓으로 한 테러였다. 계엄령이 내려진 바로 그 동서라인 한복판에 박 작가가 있었던 것. 너무나 놀랄 수 밖에 없던 상황이었다.

“만감이 교차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숲 속에서 정말 신비로운 코끼리를 보고 왔는데, 바로 다음 순간에서는 핏빛 테러를 경험하게 되다니… 아무 것도 모르는 코끼리들의 여유로움과는 반대인 도시의 테러현장에 서 있던 저는 사뭇 어정쩡한 철없는 코끼리가 돼 버렸습니다. 그때 그 시간. 내가 느꼈던 스리랑카의 슬픈하루. 밝음이 어두움으로 바뀌는 그 순간의 경계, 하염없이 순수해 보였던 코끼리의 몸짓 속으로 나를 숨기고 싶었습니다.”


그는 당시 현지인의 도움으로 스리랑카의 립톤차를 재배하는 고원지대로 피신할 수 있었다. 그날 이후 그는 단청으로 스리랑카 코끼리를 그리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에 사로잡혔다.
지난 22일부터 12월3일까지 서울 종로구 인사동 무우수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박근덕 단청 초대전 ‘알로로 달로록 철없는 코끼리’ 전시회에서는 단청으로 그린 화려한 코끼리 두 마리의 정면 모습이 단연 눈길을 끈다. 그림의 제목은 ‘Goldgardon 20190421’. 박근덕 작가의 법명이자 호인 금원(金園)의 동산에서 상상의 동물과 함께 놀고 있는 마음으로 그린 단청화다. 숫자는 바로 테러가 일어났는데 코끼를 만났던 2019년 4월21일을 뜻한다.


코끼리는 두 마리의 머리에는 하나는 연꽃, 또 다른 하나는 우리나라 토종민들레로 장식돼 있다. 코끼리의 귀는 궁궐이나 사찰의 기둥을 장식하는 단청 문양이 그려져 있다. 화문석 돗자리, 대바구니, 뜨개질할 때처럼 오방색 천이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서 엮여 있는 모양이다. 한마리는 귀가 동글동글한 모양이고, 다른 코끼리는 뾰족뾰족 각진 모양으로 엮여져 있다.


코끼리를 장식하고 있는 단청문양은 녹실, 황실로 부르는 실로 엮여져 있다. 단청에서 문양과 문양을 연결해주고, 장식하는 실이다. 그런데 코끼리 코를 지나가는 금색실의 끝은 끝이 풀려 자유롭게 흘러가고 있다. 코끼리의 눈은 우주의 행성처럼 깊이를 알 수 없는 세계로 표현돼 있다.

박근덕 작가가 그린 스리랑카 코끼리의 눈. 우주의 모습이다.
“저는 원시적인 순수의 숲에서 놀고 있는 코끼리의 눈에서 정말 우주를 봤어요. 오래된 단청 안에서 느끼는 우주도 복잡하게 얽혀 있는 세계죠. 원래 단청의 앞과 뒷쪽에는 녹실과 황실로 엮여 있습니다. 그런데 인생의 실은 알 수 없는 길같은 느낌입니다. 그래서 실 끝을 자유롭게 풀려 있게 그렸습니다.”

동국대 미술학부에서 불교미술을 전공한 박근덕 작가는 졸업 후 전국의 문화재 복원현장에서 문화재수리 기능자(화공), 단청기술자로 활동해왔다. 전통단청은 엄격한 문양과 색깔로 복원해내야 하지만, 개인적인 작품을 할 때는 자신이 좋아하는 다양한 동식물 문양을 집어 넣어 자신만의 우주를 담은 창작품을 그려낸다.

Goldgarden 봉황. 두 그림을 합치면 태극문양의 원이 된다.

그는 비단, 모시, 삼베, 한지에 자연의 풀로 염색을 하고 그 위에 여러 문양을 엮어 나간다. 기존 전통단청에 주로 쓰이는 문양인 연꽃과 목단(모란) 외에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들꽃, 물, 구름 등을 문양화해 봉황, 물고기, 나비, 고래 같은 동물의 이미지로 형상화하는 작업을 해나간다.

박 작가의 창작 단청은 대부분 음과 양이 조화를 이루는 2가지 세트로 돼 있다. 대표적인 것이 태평성대에 나타난다는 상상의 동물인 봉황이다. 봉은 수컷이고, 황은 암컷이다. 봉과 황은 항상 같이 다녀서 금슬 좋은 부부를 상징한다. 그래서 예식장 장식으로 많이 사용된다.


“우리나라에도 평화와 태평성대가 오길 바라면서 봉황을 태극 문양으로 그려봤습니다. 봉과 황이 만나면 태극문양으로 합쳐져 하나의 원이 되는 형태입니다. 서양의 피닉스(Phoenix)는 불꽃으로 많이 표현되잖아요. 그러나 저는 봉황의 날개를 파도와 물결 모양으로 표현해봤습니다.”


박 작가에게 단청이란 무엇인가하고 물었다.

“단청은 쉽게 설명하면 건물이 입고 있는 의상이라고 할 수 있어요. 임금의 옷과 신하가 입는 옷이 다른 것처럼 건물의 용도와 특징, 성격에 따라 다르죠. 우리나라에는 목조 구조물이 많은데, 여름에 비가 많이 오면 나무가 물러질 수가 있고, 겨울에 추위에도 견뎌야 합니다. 그래서 안료를 발라서 더위와 추위, 습기, 벌레로부터 보호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목조 건물에 구멍이 나거나, 옹이가 생기는 등 안 예쁜 곳에 그림을 그리거나 칠해서 덮기도 합니다. 옷으로 체형을 보정하는 것처럼 말이죠. 이렇듯 처음엔 목조 건축물을 보호하기 위해 안료를 칠하던 것이 단청이었는데, 기왕이면 아름답게 보이도록 장엄하는 역할을 하게 됐습니다.”

제주산 토종무 문양의 ‘봄 바람 아련하니…’

박 작가가 그린 코끼리의 귀와 제주 토종무 그림에는 기둥머리를 장식하는 가장 기본적인 단청인 ‘주의(柱衣)’ 문양이 들어가 있다.

천을 돗자리처럼 엮은 듯한 모양으로 기둥의 머리부분을 장식하는 ‘주의’ 문양.

“예전에는 기둥 위를 실제 여러가지 색의 천으로 감싸기도 했습니다. 기둥머리를 색색의 천을 엮어서 장식한 모양이 ‘주의’(기둥에 입힌 옷)입니다. 천들이 돗자리를 짜듯이 엮여 있습니다. 이렇듯 전통단청은 문양과 패턴, 실들이 서로 엮여 있는 형태입니다. 저는 그렇게 엮여 있는 전통단청의 문양을 하나하나 풀어서, 새로운 모양에 맞게 다시 짜는 형태로 작품을 만들어갑니다.”

Goldgarden 등대시호

그는 특히 물고기 문양을 좋아한다고 했다. 물고기는 밤에 잘 때도 눈을 감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어 ‘정진하는’ 의미를 상징하는 동물이다. 그래서 아들이 과거시험을 보러 가면 어머니가 물고기 조각을 품에 넣어주기도 했고, 불교에서는 스님들이 수행에 정진하라는 뜻에서 ‘목어(木魚)’를 조각해 매달아놓기도 한다. 박 작가는 자신이 특히 제일 좋아하는 물고기는 볼 양쪽에 연지곤지가 찍혀 있는 버들붕어라고 했다.

등대시호 꽃
등대시호 꽃

박 작가가 그린 버들붕어 모양의 단청은 등대시호와 고마리 꽃으로 장식돼 있다. 등대시호는 울릉도 고지대에서 자라는 멸종위기종의 자생식물. 작은 별이 가득한 모양의 꽃이 너무 예뻐서 단청 문양의 패턴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등대시호의 별모양 꽃을 단청문양 패턴화 시킨 작품.

물고기 한마리는 쪽 염색을 한 비단 위에 별처럼 빛나는 등대시호로 장식됐는데, 다른쪽 물고기는 고마리 풀로 장식돼 있다.

Goldgarden 고마리.

“등대시호가 희귀종, 멸종위기종이라면, 고마리는 지천에 널브러진 풀입니다. 제가 어릴 적에 시골에서는 돼지풀로 불려서 꼴을 베서 소나 돼지, 토끼에게 주던 흔한 풀입니다. 하천 주변에 엄청나게 많이 자라는 잡초입니다.

고마리 꽃
고마리 꽃

그런데도 자세히 보면 연꽃이 한꺼번에 피어있는 모양으로 너무 예뻐요. 보통 단청에는 연꽃, 모란 등 고급스럽고 귀족적인 꽃이 많이 문양으로 쓰이는데, 나만의 단청문양을 패턴화하는 창작작업에는 다양한 꽃과 동물로 새로운 시도를 합니다.“

고마리 꽃을 단청문양으로 패턴화시킨 작품.


전시장에는 선사시대 유물인 울주 반구대 암각화에 그려진 고래와 단청이 조화를 이룬 작품도 있다. ‘구절초를 삼긴 귀신고래’ ‘혹등고래와 국화’다. 돌가루를 빻아서 만든 석채를 접착제를 사용해서 고래 그림을 그리고, 그 내부에 전통 단청으로 구절초와 국화 문양을 넣은 작품이다.

박근덕 ‘혹등고래와 국화’


박근덕 ‘구절초를 삼킨 귀신고래’

- 우리나라의 전통 미술은 황(黃), 청(靑), 백(白), 적(赤), 흑(黑) 등 오방색이 기본이다. 한국의 전통 단청의 색은 어떻게 칠해지나요.
​ “불교미술은 실크로드를 타고, 인도에서 티벳과 중국을 거쳐서 들어왔습니다. 티벳, 몽골, 중국, 일본에도 단청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 와서 가장 화려하게 특색있게 발전했고, 한국적인 색상과 문양으로 단청이 발전했습니다.

보색대비와 명도차이 색단계로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단청

한국의 단청이 화려하게 보이는 이유는 뚜렷한 보색대비와 명도의 차이를 통한 색단계 덕분입니다. 단청은 붉을 단, 푸를 청자를 쓰는데요. 이 말처럼 따뜻한 색, 차가운 색, 따뜻한 색, 차가운 색 순서대로 보색대비를 하면서 칠합니다. 장삼황녹석육 등의 순서로 가는데요. 장은 장단(오렌지색)입니다. 삼은 삼청이라고 푸른색입니다. 황은 노랑색, 녹은 초록색, 석(석간주)는 붉은색 나는 기둥색입니다. 육은 살색이고요. 이처럼 난색, 한색, 난색, 한색 등이 교차하죠. 그 안에서는 명도 차이로 그라데이션을 줘서 밝고 어두움을 주기 때문에 더욱 화려하게 보입니다. 반면 중국은 푸른색 계통의 색깔을 주로 쓰고, 일본은 기둥부터 서까래까지 붉은색으로만 칠하는 단청이 발전했습니다.“

박근덕 단청 작가

- 우리나라 전통 단청은 궁궐하고, 사찰에만 했나요.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유생들이 왕한테 상소를 올립니다. ‘지금 사가에서는 공공연하게 단청을 칠하는 사치를 하고 있습니다. 단청을 못하게 해주십시요’라는 내용입니다. 단청 재료들은 전부 중국에서 수입해온 귀한 원석인데, 너무나 비싼 재료였습니다. 그래서 사치스럽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유생들은 검소하게 살아야 한다면서도, 사대부 집 중에서도 단청을 한 곳이 많습니다. 향교, 서원에도 단청을 했고요.”

제주 토종무와 제주 당근을 소재로 한 단청문양

- 궁궐과 사찰의 단청은 어떻게 다른가요.
“조선은 유교국가로 궁궐이나 관아 외부의 단청은 화려하지 않게 했습니다. ‘모로단청’이라고 부재 끝부분에만 문양을 넣고 가운데는 긋기로 마무리한 단청입니다. 부재 끝부분에 들어가는 화려한 문양을 ‘머리초’라고 하지요. 그런데 우리나라 궁궐단청의 특징이 ‘외유내강’이예요. 경복궁을 생각해보세요. 기둥이나 보의 가운데는 문양이 없고 양쪽 끝에만 있는 기본 단청이데, 임금이 계신 실내로 들어가면 천정부터 단청이 엄청나게 화려하거든요. 값비싼 푸른색 청금석도 다 씁니다. 반면 사찰은 지붕 서까래, 기둥, 보 등 외부부터 최대한 화려하게 꾸미는 것이 특징입니다. 양쪽 끝부분만 화려하게 꾸미는 모로단청과 달리, 부재의 모든 부분에 화려한 문양을 넣는 ‘금단청(錦丹靑)’을 합니다. 그러나 궁궐에는 금단청을 한 경우는 없습니다.“

단청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연꽃 문양
- 문화재 수리 단청 기술자가 되려면 어떤 공부를 해야 하나요.
“단청에는 회화, 서예, 공예, 채색, 드로잉까디 다 포함돼 있습니다. 문화재 수리 단청기술자는 탱화도 보수해야 합니다. 탱화는 티벳에서 수행승들이 들고 다니기 편하게 두루마리 그림을 그려서 갖고 다니는 ‘탕카’에서 기원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후불 탱화가 두루마리가 아닌 벽화로 그려져 있는 곳이 많아요. 사찰 단청에는 탱화도 있지만, 산수화도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산스크리트어 글씨나 현판의 글과 그림도 많습니다. 그래서 단청 기술자는 글씨와 탱화, 화조도, 산수화, 수묵화 등도 다 공부해야 합니다. 단청은 종합적인 개념입니다. 그래서 단청으로 불교 미술을 공부하면 모든 종목을 다 잘할 수 있게 되요. 민화도 잘 하게 됩니다. 절에는 호랑이가 그려진 산신도도 있기 때문입니다.“

단청의 모란꽃 문양
- 창작단청을 하게 된 계기는.
“대학을 졸업한 후 문화재 복원 현장에서 빡세게 일하면서 배웠습니다. 그래서 제게 단청은 언제부터인가 일이 돼 있었습니다. 처음 비계 위에 올라가 옛 사람들의 붓터치를 느꼈을 때의 그 두근거림은 관성화됐습니다. 그냥 일이라는 열쇠로 잠겨진 서랍 안에 들어가 있었죠. 그런 나 자신을 발견했을 때 현장을 벗어나 천천히 걸으며 자연 속에서 사색을 즐기는 것을 위안으로 삼곤 했어요. 그럴 때면 나는 나름 행복한 일을 하는 사람이구나. 내가 일하는 곳들은 언제나 고개만 돌리면 아름다운 풍경이 눈 앞에 펼쳐지는 곳이 대부분이고, 자연 속에서 천천히 걷다보면 풀 한포기, 돌 하나에도 눈길이 머물게 되지요.

제주 당근을 그린 장단(長丹)

익숙한 풍경 속 점하나였을 작은 꽃잎에도 우주가 있었고, 먼지 쌓인 서까래에서 박락돼 가는 꽃에도 우주가 있었습니다. 나를 자연스레 미소 짓게 하는 초록의 풍경들을 그리고 싶었어요. 내가 좋아하는 물고기와 나를 위로해 주던 들꽃들을 단청 문양화해보고자 하는 생각을 모티브로 작업을 했습니다. 녹, 황실이 여러 자연물과 유기적으로 결합하고, 오행의 색이 빛과 어둠을 만나 화려하게 채색되는 사이, 나는 또다른 우주와 만나게 되는거죠.“

제비꽃 단청문양 ‘如如’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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