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1세대 조경가 정영선의 ‘땅에 쓰는 시’[김선미의 시크릿가든]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8월 31일 10시 00분


코멘트
국내 1세대 조경가 정영선 씨의 삶은 곧 대한민국 50년 조경 역사다. 그는 “우리 국토를 사랑의 마음으로 보면 하나님이 만드신 하나의 커다란 정원”이라고 말한다. 정다운 감독 제공
그는 대한민국 땅에 시를 쓴다. 고속 성장을 위해 달려온 도시 풍경에 느릿한 휘파람 같은 자연의 풍광과 소리를 담는다. 반세기 넘게 역사적 장소들의 조경을 맡아온 정영선 조경설계 서안 대표(82). 서울 아시아선수촌 아파트, 올림픽공원, 선유도공원, 여의도샛강생태공원, 서울식물원, 아모레퍼시픽 용산 신사옥, 크리스찬 디올 성수 콘셉트 스토어, 경기 용인시 호암미술관 희원, 남양주시 다산생태공원…. 정영선 조경가의 궤적은 곧 대한민국 조경의 역사다.

국내 조경학계와 업계의 거목이지만 대중에게는 생소할 수 있는 정영선 조경가의 삶을 조망한 다큐멘터리 영화가 최근 선보였다. 제20회 EBS 국제다큐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선정된 ‘땅에 쓰는 시’(감독 정다운)다. 내년 봄 개봉 예정인 이 영화는 영화제 기간인 26일 서울 광화문 시네큐브에서 상영됐다. 정영선 조경가는 “조경은 꽃과 나무를 심는 차원이 아니다. 남길 것은 잘 남기고 그 위에 새로운 그림을 그려 한국적 경관을 아름답게 만드는 작업”이라고 한다.

●80대에도 현역인 ‘할머니’ 조경가
대한민국의 조경 역사는 1972년을 출발점으로 잡는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경제수석비서실에 조경·건설 담당 비서관직을 신설하고 한양대 건축학과 출신의 재미(在美) 조경가 오휘영 씨를 그 자리에 임명했다. 제3공화국의 경제개발정책으로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면서 훼손된 국토를 정비하기 위해서였다.

오 비서관은 조경전문인 육성이 시급하다고 봤다. 그의 건의에 따라 서울대와 영남대, 서울대 환경대학원이 제1회 조경학과 신입생을 모집한 때가 1973년 3월이다. 정영선 조경가는 이렇게 설립된 서울대 환경대학원 조경학과의 제1호 졸업생(1975년)이자 1980년 한국 1호 국토개발기술사를 획득한 최초의 여성 기술사다. 1984년 아시안게임 기념공원과 아시아선수촌 아파트, 예술의전당 현상설계 공모에서 당선되면서 그의 조경 인생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환경조경발전재단, ‘한국조경백서’).

정영선 조경가는 “우리의 경관은 한 번 잘못 건드리면 되돌리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다”며 “어느 나라에 비교해도 아름다운 경관이 지속적으로 전승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정다운 감독 제공
한국의 조경이 강력한 정부 주도로 이뤄지다 보니 정영선 조경가는 한동안 나랏일을 했다. 그가 아시아선수촌 조경을 맡아 도로의 선형을 설계할 때에는 공무원들이 그의 사무실에 앉아 채근했다고 한다. “왜 설계도면을 그리고 있나. 나무는 언제 심나”라고. 조경을 그저 나무 심는 일로 치부하던 때였다. 그는 50여 년 동안 이런 인식에 맞서면서 굵직한 공공·기업 프로젝트를 통해 대한민국의 경관을 만들어냈다.

이제는 기업도 조경의 중요성을 잘 아는 시대가 됐다. 정영선 조경가는 최근 몇 년 동안 아모레퍼시픽 용산 본사 신사옥과 북촌 설화수 플래그십 스토어, 크리스찬 디올 성수 콘셉트 스토어의 조경도 맡았다. 디올 성수 조경 때에는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에 있는 디올하우스의 장미 정원을 구현하면서 한국의 자생 꽃들을 섞어 심었다. 프랑스 정원 속 한국 정원이었다.

글로벌 MZ세대들의 발길이 줄잇는 크리스찬 디올 성수. 정영선 조경가는 프랑스 장미와 한국의 야생화를 섞어 심어 프랑스 정원 속 한국 정원을 표현했다. 조경설계 서안 인스타그램
노르망디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디자이너 크리스찬 디오르에게 프랑스 장미가 각별했다면, 할아버지 과수원에서 사과꽃 흩날리는 모습을 보고 자란 정영선 조경가에게 한국의 꽃은 곧 그의 정체성이리라. 조경진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정영선 선생님은 늘 새로운 길을 개척해 왔다”며 “인문학적 성찰로 우리 자연경관을 잘 살리면서도 식물과 재료를 현대적으로 재구성하는 상상력이 놀랍다”고 한다.

후배 조경가들로부터 ‘할머니’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정영선 조경가는 80대의 나이에도 여전히 호미를 들고 전국을 누빈다. 산과 들을 다니며 자연을 유심히 관찰해 노트에 기록한다. 땅에 핀 작은 풀에도 ‘잘 잤니?’라고 묻는다. 영화 ‘땅에 쓰는 시’를 만든 정다운 감독은 “정영선 선생님은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에도 소녀처럼 감탄하고 일상적 표현에도 시적 감수성이 드러난다”며 “그런 점이 선생님을 여전한 현역으로 만들고 있는 비결 같다”고 했다.

●‘정영선 표’ 한국의 대표 조경들


1. 여의도샛강생태공원
서울 한복판에서 야생의 자연을 온몸의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여의도샛강생태공원. 김선미 기자
여의도샛강생태공원에 들어서면 서울 한복판에 이런 진짜 자연이 있나 놀라게 된다. 그런데 1990년대 이 공원의 조경을 맡았던 정영선 조경가의 말을 들어보면 갖가지 역경이 있었다.

“당시 한강관리사업소 자문위원을 맡았는데 공무원들이 처음 만들어놓은 개발안에는 주차장과 운동장이 있었다. 한강이라는 훌륭한 자연 자원을 인위적으로 개발하는 게 억울해 미칠 것 같았다. 그래서 공무원들 앞에서 김수영의 시 ‘풀’을 읽었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홍수에 떠밀려갈 수 있다는 이유로 한강 변에 나무를 못 심게 했다. 정영선 조경가는 생태학자, 곤충학자, 조류학자들을 불러 모아 샛강을 풀과 물고기가 사는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머리를 맞댔다. 물기를 촉촉하게 머금는 예쁜 버드나무를 꼭 살려내야겠다는 마음이었다고 한다.

자연 본연의 모습을 간직한 여의도샛강생태공원. 김선미 기자
공원을 만들 때 인근 여의도 아파트 주민들은 빵을 사다 주면서 “감사하다”고 했지만, 공무원들은 삿대질부터 했다. “공원으로서 갖춰야 할 화장실도, 관리 사무실도, 주차장도 안 갖춰놓고 풀만 심느냐”고. 힘겨운 과정을 극복하고 1997년 태어난 여의도생태공원에는 멸종위기종인 수리부엉이, 천연기념물인 황조롱이와 수달이 돌아왔다.

2. 선유도공원
영화 ‘땅에 쓰는 시’의 포스터는 정영선 조경가의 대표작인 선유도공원을 배경으로 했다. 정다운 감독 제공
선유도공원은 정영선 조경가의 명실상부한 대표작이다. 한강의 섬 선유도의 옛 정수장 시설을 활용한 국내 최초의 재활용 생태공원으로 2002년 문을 열었다. 폐허의 흔적 위에 더해진 새로운 녹색의 생명력을 접하면 저절로 시간의 의미를 사색하게 된다.

“선유도공원은 산업구조물을 미적 오브제로만 소모하는 소극적 태도를 넘어 공원 전체의 공간 구조를 직조하는 데 활용했다. 날것으로 드러낸 정수장 폐허의 부스러진 외피를 야생식물로 뒤덮어 거친 풍경을 연출했다. 정수장을 활용한 서울숲(2005년 개장)과 서서울호수공원(2009년 개장), 철도 폐선을 활용한 경의선숲길(2012년 개장) 등에 큰 영향을 줬다.” (이명준 국립한경대 조경학과 교수)

겸재 정선이 한강의 풍경을 그렸던 풍류를 느껴볼 수 있는 선유도 속 선유정. 김선미 기자
정영선 조경가의 조경 철학 중 하나는 “조경가는 연결사”라는 것이다. 그는 선유도공원에 처음 가 봤을 때 선유도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울고 싶을 정도였다고 했다.

“겸재 정선이 한강의 풍경을 그리던 곳 아닌가. 팔당부터 마포까지 죽 이어지는 풍경을 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용도 폐기된 정수시설을 부숴버리면 그 시절의 기억이 사라지기 때문에 옛것과 새것을 연결했다. 원래 있던 동쪽 기둥에 나무를 심으니 녹색 기둥 정원이 됐다. 공원도 여러 형태가 필요하다. 선유도공원은 마음이 쓸쓸한 사람들이 와서 쉬었으면 했다. 한 여성이 삶을 끝내려고 갔다가 살아야겠다고 마음먹고 돌아왔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감사했다.”

3. 서울아산병원 신관
정영선 조경가는 남편이 10년간 병상에 누워있어 힘든 시간을 보냈다. 이 무렵 현대그룹으로부터 서울아산병원 조경 프로젝트를 의뢰받았다.

“환자도 보호자도 가슴이 뻥 뚫리게 숨 쉴 수 있는 곳, 비록 병상에 있어도 창 너머로 계절의 감각을 느낄 수 있는 곳, 환자 앞에서 슬픈 내색을 할 수 없는 가족들이 나와서 펑펑 울 수 있는 곳. 병원의 정원은 그런 따뜻한 위로의 정원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병원의 지하주차장 상부에 거대한 인공 숲을 조성했다. 왕성한 생명력을 가진 식물들을 밀도 높게 심었다. 봄에 식물이 싹 틔우는 모습을 보면서 환자들이 회복의 의지를 다졌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4. 호암미술관 희원
한국의 매화, 모란 등이 석조 미술품들과 어우러지는 호암미술관 희원. 조경설계 서안 인스타그램.
경기 용인시 호암미술관은 미술관만큼 부속 정원이 사랑받는다. 한국 전통 정원의 이름은 ‘희원’. 정영선 조경가는 이 정원을 통해 담백하면서도 아름다운 한국의 경관을 전한다. 다양한 석조 미술품들이 곳곳에 있어 ‘오픈 뮤지엄’으로서의 기능도 한다.

1년 반 동안의 리노베이션을 거쳐 재개관한 호암미술관에서는 현재 김환기 화백의 회고전이 열리고 있다. 정자 옆 희원의 연못에는 프랑스의 유명 미술가 장 미셸 오토니엘의 유리구슬 작품 ‘황금 연꽃’이 설치돼 있다. 한국의 정자와 꽃과 돌인데, 그 어떤 서구의 예술품도 이 한국식 정원과 어우러지는 마법이 실현된다.

프랑스 미술가 장 미셸 오토니엘의 ‘황금 연꽃’ 작품이 설치된 호암미술관 희원. 김선미 기자


●“우리 땅을 존중하고 보살피는 게 정원적 삶의 태도”
정영선 조경가 그 자신의 정원은 경기 양평에 있다. 고속도로변이나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야생의 풀과 꽃이 심겨 있다.

“할아버지는 시골에서 작은 과수원을 했다. 아버지는 대구의 기독교 계통학교 교사였는데, 외국 선교사들이 늘 학교 정원에 꽃과 나무를 심었다. 그래서 토속적인 시골 정원과 서양식 정원을 어려서부터 두루 접했다. 나의 정원은 소박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았으면 한다.”

경기 양평에 있는 정영선 조경가의 정원. 우리 국토에서 평범하게 볼 수 있는 풀과 꽃을 심었다. 정다운 감독 제공
정영선 조경가는 왜 조경을 ‘땅에 쓰는 시’라고 할까. 그는 2021년 성종상 서울대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 교수와 ‘우리 시대 한국인의 삶과 정원’이라는 주제로 대담을 가진 적이 있다(한국조경학회, ‘한국 조경의 새로운 지평’). 그중에는 이런 대목들이 있다.

“저는 정원이라는 것을 인간이 인간답게 살면서 잠시 빌려 쓰는 땅에 대한 ‘헌사’라고 생각합니다. 정원, 아니 우리 삶의 기본적인 ‘터’로서의 대지(흙)는 존중하고 보살펴야 하는 곳이기에 그 보살핌 자체가 곧 정원적 삶의 태도가 아닐까요.”

“땅을 잘 읽고 그에 맞게 식물과 다른 정원 요소, 그리고 동선과 공간을 적절히 잘 구성하는 것이 정원 만들기의 핵심이라 할 수 있지요. 기후가 변하며 지구는 신음했고, 이상 징후는 가속화하고 있습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는 달라지는, 달라져야만 하는 삶의 자세를 말합니다. 정원은 그런 자세와 삶을 위한 아름다운 필수 핵심 무대입니다.”

“조경은 땅에 쓰는 한 편의 시가 될 수 있고, 깊은 울림을 줄 수 있습니다.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보면 가슴이 뛰듯, 우리가 섬세히 손질하고 쓰다듬고 가꾸는 정원들이 모든 이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고 치유와 회복의 순간이 되길 바랍니다.”

정영선 조경가의 손길이 닿은 경기 남양주시 다산생태공원. 그는 반세기 동안 한국 사회에 생태 경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정다운 감독 제공
대한민국 조경 반세기. 여전히 현장에서 답을 찾는 현역의 80대 ‘할머니 조경가’는 꿈이 있다. 미래 세대에게 제대로 된 한국적 경관을 물려주는 것이다. 지금껏 그를 키운 팔 할은 ‘우리 땅과 우리 풀이 전하는 자연의 위로’가 아니었을까. 기후 위기와 디지털 전환이 가속화하는 요즘, 그 위로를 다음 세대에게 전할 사명감이 묵직하게 느껴진다.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