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름 한방울 안나지만 항공유 수출 1위, 세계 최고 수준 정유-운송 인프라의 힘

  • 동아일보

[위클리 리포트] 중동 전쟁으로 경쟁력 증명된 K항공유
K항공유, 울산-여수서 정제 거쳐 지하 송유관 운송… 값싸고 품질 좋아 세계 시장 30% 차지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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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스라엘과 이란의 전쟁으로 전 세계 하늘길에는 비상이 걸렸다. 항공유 가격이 치솟으면서 항공사들은 비명을 지르고, 승객들은 많게는 왕복 100만 원이 넘는 유류할증료를 부담하고 있다. 일부 국가는 항공유를 구하지 못해 아예 항공편 운항 중단까지 했다.

그런데 정작 한국은 달랐다. 항공유 가격은 올랐지만, ‘항공유가 부족하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전 세계에서 항공유를 가장 많이 수출하는 나라는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도, 미국도 아닌 대한민국이기 때문이다. 대한석유협회에 따르면 한국은 2016년 이후 항공유 수출 1위 자리를 한 번도 놓치지 않았다. 내수를 충분히 감당하고도 수출할 수 있을 만큼 생산능력을 갖춘 덕분에 항공유 부족 사태에서도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모습을 보인 것이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가 어떻게 세계 항공유 시장의 약 30%를 책임지는 국가가 됐을까. 항공유는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떤 과정을 거쳐 세계 곳곳으로 전달될까. 항공유의 탄생부터 비행기 날개로 들어가기까지, 그 모든 여정을 따라가 봤다.

● ‘K항공유’ 24시간 통제하는 전장 지휘소

9일 찾은 국내 최대 규모의 정유·석유화학 단지인 SK이노베이션 울산 콤플렉스(CLX)의 제3 원유정제설비(CDU) 조정실. 이곳은 세계 각지에서 들여온 원유를 항공유로 만드는 전 과정을 총괄하는 컨트롤 타워다. 석유 제품 생산 공정의 흐름을 보여주는 도식들이 가득한 모니터 수십 대가 이곳을 메우고 있었다. 벽면엔 공장 곳곳을 실시간으로 비추는 폐쇄회로(CC)TV 화면들로 가득했다. 마치 전장을 지휘하는 지휘소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수십 m 높이의 거대한 증류탑(원유를 끓여 항공유 등 석유 제품을 분리하는 설비)과 석유 제품들이 이동하는 송유관(파이프라인)에서 일어나는 모든 화학 반응과 공정 흐름이 이곳 조정실 모니터에 나타났다. 작업자들은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혹시 모를 돌발 상황에 대비해야 하기 때문에 조정실은 24시간 365일 가동된다. 하나의 조건이라도 어긋나면 항공유의 품질이 떨어지고 생산량도 줄어들 수 있기 때문에 공정과 제품 상태를 실시간으로 확인하면서 상황에 맞게 설비를 조절하는 것이 이곳 근로자들의 임무다.

이승하 SK에너지 대리는 “항공유가 만들어지는 공정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어야 항공유를 더 많이 생산하면서도 최고의 품질을 유지할 수 있다”며 “항공기는 낮은 온도와 높은 고도에서 운항하기 때문에 매우 까다로운 품질 기준이 요구된다. 그 조건을 모두 충족하면서 생산량을 극대화하는 것이 기술력”이라고 말했다.

항공유는 휘발유와 경유, 액화석유가스(LPG), 중유처럼 원유를 정제해 만드는 석유 제품 가운데 하나다. 원유는 여러 성분이 섞인 점액질 형태의 액체다. 원유를 가열해 상압 증류탑으로 보내면 끓는점이 낮은 성분은 위로 올라가고, 무거운 성분은 아래에 남는다. 각 높이에 따라 LPG, 나프타, 휘발유, 등유, 경유 등의 제품을 분리한다.

이 가운데 등유가 항공유의 기반이 된다. 여기에 솔리드 베드 메록스(SBM) 공정을 거쳐 부식을 일으키는 황과 악취를 유발하는 메르캅탄을 제거한다. 또 항공기가 저온·저압 환경에서 운항하는 만큼 정전기 방지제와 빙결 방지제, 산화 방지제 등을 첨가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대표적인 항공유가 ‘Jet A-1’이다. 대부분의 민간 여객기가 사용하는 연료로, 저온에서도 잘 얼지 않고 연료소비효율이 뛰어나다.

군용 항공기에 사용하는 연료는 민간 항공유와 다르다. 대표적인 군용 항공유인 ‘JP-8’은 전투기와 수송기 등 다양한 군용기의 가혹한 운용 환경을 고려해 부식 방지제와 윤활성 개선제, 정전기 방지제, 착빙 방지제 등을 첨가한 연료다. 군 작전 환경에 맞춰 성능과 내구성을 강화한 것이 특징이다.

항공기에 주유를 하고 있는 모습. 공항 지하에 매설된 항공유 송유관과 항공기 날개 밑 주유구를 호스로 연결해서 항공기에 주유한다. ‘하늘 위의 호텔’이라 불리는 대형 항공기인 A380도 30∼40분 정도면 급유를 마칠 수 있다. 인천=이원주 기자 takeoff@donga.com
항공기에 주유를 하고 있는 모습. 공항 지하에 매설된 항공유 송유관과 항공기 날개 밑 주유구를 호스로 연결해서 항공기에 주유한다. ‘하늘 위의 호텔’이라 불리는 대형 항공기인 A380도 30∼40분 정도면 급유를 마칠 수 있다. 인천=이원주 기자 takeoff@donga.com
● 한반도 땅속 관통하는 ‘숨은 혈맥’ 송유관망

항공유는 안전한 비행을 위한 핵심 요소인 만큼 생산부터 운송, 저장, 급유에 이르기까지 모든 단계에서 엄격한 품질 관리를 거친다. 석출점(연료가 얼기 시작하는 온도)과 인화점, 수분 함량, 부식 유발 물질, 열안정성 등 30여 가지 품질 시험을 통과해야만 항공기에 사용할 수 있다. 이렇게 생산된 항공유는 선박과 탱크로리, 송유관 등을 통해 운송된다.

울산과 전남 여수 등 정유공장에서 생산된 항공유 중 공항에서 바로 사용되는 물량은 전국에 깔려 있는 송유관망을 통해 수도권 저장기지로 이송된다. 이후 항공유 전용 송유관을 통해 인천공항과 김포공항으로 공급된다. 공항에 도착한 항공유는 저장탱크를 거쳐 공항 지하에 매설된 배관망으로 이동한다. 이후 급유차가 지하 배관에 연결해 연료를 공급받은 뒤 항공기 날개 아래 급유구와 연결해 주입한다. 반면 하이드런트 시설(공항 지하에 설치된 급유 인프라)이 없는 공항이나 배관망이 설치되지 않은 계류장에서는 연료를 실은 탱크형 급유차(Refueler)가 직접 항공기까지 이동해 연료를 공급한다.

인천국제공항에는 10만 배럴 규모의 저장탱크 12기와 약 65km 길이의 지하 하이드런트 배관망, 438개의 급유시설이 구축돼 있어 하루 수백 편의 항공기에 안정적으로 연료를 공급하고 있다.

● 바다 위 항공유 수출기지

자료: 페트로넷
자료: 페트로넷
수출되는 항공유는 바닷길을 통해 전 세계로 향한다. 9일 오후에도 울산 SK CLX 제6부두에는 길이 182m, 폭 32m 규모의 유조선이 접안해 있었다. 선박은 육지에서 수백 m 떨어진 바다 위에서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선박까지는 바다 위로 길게 설치된 차 한 대 폭의 도로를 따라 수백 m를 이동해야 했다. 도로 옆으로는 각종 석유 제품이 이동하는 파이프라인이 바다 위로 길게 이어져 있었다. 선박이 접안하면 로딩암(Loading Arm)이라 불리는 설비가 파이프라인과 선박을 연결하고, 파이프라인을 따라 이동한 항공유가 선박으로 옮겨진다. 이종한 SK온 트레이딩인터내셔널 해상출하2팀 대리는 “오늘 선박에는 31만5000배럴의 항공유를 싣는데, 약 24시간이 걸렸다”며 “31만5000배럴은 인천과 미국 뉴욕을 오가는 장거리 항공기가 약 100회 왕복할 수 있는 양”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은 하루 평균 약 25만 배럴의 항공유를 수출한다. 네덜란드, 싱가포르 등 주요 항공유 수출국보다 2배 가까이 많은 규모다. 특히 대한민국은 해상 운송의 요지라는 지리적 이점을 바탕으로 미주와 유럽, 동남아, 대양주 등 세계 각국으로 항공유를 수출하고 있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에 따르면 미국이 수입하는 항공유 가운데 70%는 한국산이다. 특히 로스앤젤레스와 샌프란시스코, 시애틀 등 미국 서부 연안 지역은 수입 항공유의 약 85%가 한국산이다. 미국 서부는 로키산맥 때문에 미국 남부에 있는 최대 정유단지인 걸프코스트와의 육상 파이프라인 연결이 어렵다. 여기에 미국 항구 간 화물 운송에는 자국 선박만 이용하도록 한 ‘존스법(Jones Act)’까지 적용돼 미국 내 운송 비용도 높다. 자국 선박으로만 화물을 실어날라야 하다 보니 운송 선박 부족과 운임 폭등이 불가피한 것이다. 텍사스나 루이지애나에서 생산한 항공유를 캘리포니아까지 운송하는 것보다 한국에서 수입하는 편이 더 경제적인 경우가 많다. 가격 경쟁력과 품질을 모두 갖춘 한국산 항공유에 세계 최대 산유국인 미국이 의존하는 배경이다. 여기에 호주 등 아시아태평양 지역 국가들의 정유 설비 축소와 중동 정세 불안까지 겹치면서 한국산 항공유의 중요성은 더 커지고 있다.

● 백사장에서 피어난 세계 최대의 정유 인프라

한국이 항공유 수출 강국으로 성장한 비결은 1960년대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울산, 여수, 대산(충남 서산) 등에 구축한 세계 최대 규모의 단일 부지 정유공장이 기초가 됐다. 현재 한국으로 수입되는 원유의 약 70%는 중동산인데 원유는 산지마다 성분이 달라 항공유를 효율적으로 뽑아내는 ‘가공 능력’이 곧 경쟁력이다. 국내 정유사들은 세계 최고 수준의 정제 기술과 첨단 공정 관리로 생산량을 극대화하는 한편, 품질과 원가 경쟁력까지 확보했다.

신민서 SK에너지 생산조정팀 PM은 “내수 수요를 넘어 수출 물량까지 소화할 수 있는 설비와 대형 부두를 모두 갖추고 있어, 대한민국은 초기부터 수출에 최적화된 정유 인프라를 구축한 셈”이라고 설명했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한국이 세계 최대 항공유 수출국으로 자리 잡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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