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에 ‘서사’ 한 스푼을 더하다…세계관으로 대중과 소통 꾀하는 미술작가들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2월 22일 10시 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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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광주의 한 미술관, 토끼장에 있던 토끼가 무더기로 실종된다. 사건은 미미한 재산 피해로 종결되지만 찝찝함이 남은 형사. 그는 경찰서에 휴직계를 낸 뒤 소설가로 분장해 미술관 입주작가가 된다. 1월부터 7월까지 잠입수사를 진행하던 형사는 미술관에서 계속 사라지는 다른 존재들을 발견하는데….》

어느 소설의 줄거리가 아니다. 한국화를 그리는 정해나 작가(37)의 작업일지다.

정해나 작가의 ‘의문의 방문객’(2020년). 토끼들이 사라진 토끼장을 그렸다. 정 작가의 이야기 속 형사는 용의자를 수사하기 위해 역대 입주 작가 명단을 살피다가 여성 작가들 대다수가 어느 순간 소리 없이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작가는 이러한 이야기와 연작을 통해 비자발적으로 사회 안에서 설 자리를 잃어가는 여성들, 침묵을 강요받은 약자들을 그린다. 이 작품은 현재 일민미술관 ‘다시 그린 세계: 한국화의 단절과 연속’에 전시되어 있다. 일민미술관 제공

‘의문의 방문객’(2020년)을 시작으로 한 그의 2020년 작품들은 형사의 눈에 비친 사람들과 장면을 기승전결에 따라 화폭에 담은 것이다. 정 작가는 개인전을 열 때마다 한편의 가상 이야기를 구상해 글로 적고 관람객들에게 공개한다. 최근 만난 그는 “결국 글은 사라지고 그림만 남을 것이라는 우려 섞인 조언을 많이 듣는다. 하지만 제 작품에 깊게 공감해주는 소수의 관람객만 있어도 살 수 있는 게 작가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화가는 그림으로 말한다’는 암묵적인 철칙에 틈이 생기고 있다. 그림에 스토리텔링이 입혀지면서부터다. 젊은 작가들을 중심으로 한 이 움직임은 꽤나 흥미롭다. 작품에 별도의 설명이 없는 경우 해석의 여지를 넓게 열어둔다는 장점이 있지만 되레 어렵게 느껴질 때도 많다. 그래서 젊은 작가들은 작품에 ‘이야기’나 ‘세계관’을 삽입한다. 이들의 작업 향방을 살펴보면 대중과의 적극적 소통 가능성을 기대해볼 수 있다.

최수진 작가(36)는 자신의 작업을 도와주는 제작자들을 그린다. 그런데 실존 인물은 아니다. 2015년부터 이어온 ‘제작소 사람들’ 시리즈를 보면, 화폭 속에는 열매에서 색을 추출하거나 종류별로 분류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작가는 이들이 본인 대신 색을 주워 모아주는 ‘동료‘라고 말한다.

최수진 작가의 ‘빨강 건져올리기’(2021년). 작가는 “2014~2015년 인천에 있는 한 레지던시에 입주하게 됐는데 집에서 왕복 5시간 거리였다. 작업실 문을 열면 여행지에 도착한 느낌이었다”고 했다. “그때부터 작업실 안에서 일어나는 일 자체에 집중하게 됐다”는 작가는 작업 준비 과정 자체를 우화적인 그림으로 표현했다. 작가 제공

이 설정은 최 작가의 고독함에서 비롯됐다. 그는 “화가는 대개 혼자 모든 것을 판단한다. 이 과정에서 막연함을 느꼈다. 그때 ‘같이 작업을 꾸리고 의지할 동료가 있다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올해 그는 ‘제작소 사람들’로부터 한 단계 도약을 목표하고 있다. “제작소 사람들은 이상적인 회화를 만드는 데 필요한 친구들이다. 이제는 그 ‘이상적인 회화’가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만들 때”라며 말이다.

도파민최 작가의 ‘Welcome to Jurassic Park_2’(2022년). 작가가 영화 ‘쥬라기 공원’을 봤을 때 실제 느꼈던 충격들을 회상하며 그떄 뇌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렸다. 작가 제공

좀 더 직접적인 세계관 설정법이 있다면, 간판 캐릭터를 활용하는 것이다. 도파민최 작가(36)가 대표적이다. 2015년부터 그의 작품에는 분홍색 몸통을 가진 괴생명체가 항시 등장한다. 도파민을 의인화한 캐릭터다. 도파민들은 아이스크림을 공중에 힘껏 던지거나, 울부짖는 공룡 앞에서 달리고 있다. 작가는 “뇌 안에서 벌어지는 엉뚱한 상상과 그 안에서 바삐 움직이는 도파민들을 장면화한 것”이라고 했다.

세계관이라는 관념에 글이 더해지면 내용은 풍성해진다. 박민준 작가(51)는 집필한 장편 소설만 벌써 2권이다. 그는 본인 소설 속 인물과 사건을 회화로 재현한 작품들을 소설과 함께 발표해왔다. 천재 곡예사인 형 라포와 평범한 동생 라푸의 이야기인 ‘라포르 서커스’(2018년)는 캐릭터 설명글을 쓰다 소설로 발전했으며, 한 미술사학자가 600년 전 활동한 화가의 최후 작품을 추적하는 ‘두 개의 깃발’(2020년)은 처음부터 소설을 염두에 둔 작업이었다.

갤러리현대 전시장 1층 전경. 16세기 중반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즉흥 가면극 ‘콤메디아 델라르테’에 근거한 초상 연작들이다. 그림 옆에는 작가가 실제 가면극을 참조해 캐릭터별 성격에 맞춰 작성한 대사 모음집이 있다. 갤러리현대 제공

본인이 만든 세계에 관심이 많다고 말하는 박 작가. 올해엔 조금 힘을 뺐다. 서울 종로구 갤러리현대에서 진행되는 그의 개인전 ‘Ⅹ’(12월 21일~내년 2월 5일)에 신작 소설은 없다. 출품작 40여 점 중에는 서사 없이 즉흥적으로 그려진 작품도 있다. 하지만 이야기가 포함된 작품도 여지없이 등장한다. 동물 가면을 쓴 9명의 초상회화 ‘콤메디아 델라르테’ 연작(2022년)이 대표적이다. 작가는 “각 캐릭터만의 복식과 성격을 고려해 그들이 할 법한 대사를 작성해 전시장 초입에 리플렛 형식으로 배치했다”며 “제 작품을 말로 설명하는 것이 어려워 시작한 글쓰기다. 글과 그림의 관계를 다각도로 살피셨으면 한다”고 말했다.

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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