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천재’ 안창남이 독립문 상공을 돌던 이유는…

  • 동아일보

한용운 등 54명이 후원회 결성… 1922년 경성 하늘서 최초 비행
서대문형무소 투옥된 동포 생각
이후 독립운동 투신해 교관으로
국립항공박물관서 무료 전시회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소장한 1923년 일본 잡지 ‘역사사진’ 8월호에 실린 안창남 선생. 1921년 비행학교 졸업 1년 만에 비행면허를 딴 선생은 일본에서도 ‘비행 천재’로 불렸다. 국립항공박물관 제공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소장한 1923년 일본 잡지 ‘역사사진’ 8월호에 실린 안창남 선생. 1921년 비행학교 졸업 1년 만에 비행면허를 딴 선생은 일본에서도 ‘비행 천재’로 불렸다. 국립항공박물관 제공
1922년 12월 10일 낮 12시 반경. 비행기 한 대가 경성(京城) 하늘로 날아올랐다. 오색 전단이 흩날리자 5만 관중이 목이 터져라 환호성을 질렀다. 한국인이 한반도 하늘을 비행한 최초의 순간. 하지만 안창남 선생(1901∼1930)은 1923년 1월 월간지 ‘개벽’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하늘 위에서 바라본 독립문은 몹시 쓸쓸해 보였습니다. 그냥 지나치기 섭섭해 비행기 머리를 조금 틀어 독립문 위까지 떠가서 휘휘 돌았습니다. 서대문감옥에 갇혀 있는 형제들이 내 마음을 봐주었을지….”

독립운동가인 안창남이 조선 땅에서 처음으로 날아오른 지 올해로 100년. 당시 동아일보가 주최한 ‘안창남 고국 방문 비행’은 한국 비행사(史)를 바꾼 순간이다. 이날 행사는 만해 한용운(1879∼1944) 등 조선인 54명이 후원회를 결성해 성사시킨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운 역사적 사건이었다. 서울 강서구 국립항공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기획전 ‘공중용사 안창남’은 이런 소중한 발자취를 만끽할 기회다. 선생과 관련된 기사, 사진 등 기록물과 관련 다큐멘터리 영상자료들로 전시를 구성했다.

1913년 8월 29일. 용산에서 열린 일제 해군 나라하라 산지(奈良原三次)의 곡예비행 행사는 열두 살 ‘소년 안창남’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일제의 기술 수준에 기죽을 법도 하건만, 소년은 “저까짓 것 나도 배우면 저만큼은 넉넉히 할 것”이라고 썼다. 1919년 휘문고 3학년 때 부모님 몰래 3000원(현 가치 3억 원)을 들고 일본으로 갔다. 오사카자동차학교에서 3개월 만에 운전면허를 취득한 뒤 1921년 일본 비행학교를 졸업했고, 1922년 5월 11일 2등 비행사 면허증까지 땄다. 일본에서도 타고난 천재라며 극찬 받았다. 당시 동아일보는 “안 씨의 활약은 눈부셨다”며 크게 보도했다.

부와 명예를 거머쥘 수 있었지만 선생은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25년 2월 중국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접촉해 산시(山西)항공학교 교관으로 활동했다. 1928년 대한독립공명단을 조직해 독립군을 양성했다. 하지만 1930년 4월 2일 훈련 도중 비행기 엔진 문제로 추락해 순국했다. 이때 나이가 겨우 30세였다.

강나진 학예연구사는 “항공 독립운동의 꿈을 펼치지 못한 채 떠났지만 선생이 남긴 희망의 씨앗이 싹터 지금의 항공 발전을 가능케 했다”고 말했다. 선생은 200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10월 10일까지.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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