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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문화

군인의 칼이 녹슨다면, 그것이 평화일수도

임준철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입력 2022-04-07 03:00업데이트 2022-04-07 0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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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를 영화로 읊다]〈36〉장사의 낮잠
애니메이션 ‘붉은 돼지’에서 마르코는 전쟁 영웅이었지만 인간이길 거부하고 돼지가 된다. 파시스트의 참전 요구를 거절하고 은신처에서 한가로이 낮 잠을 잔다. 브에나비스타코리아 제공
가브리엘 살바토레 감독의 영화 ‘지중해’(1991년)는 전쟁을 배경으로 하지만 전투 장면이 없다. 제2차 세계대전 중 그리스의 작은 섬에 파병된 이탈리아 병사들은 사령부와 연락도 끊긴 채 주민들과 어울려 지중해의 햇빛 아래 뛰어논다. 이런 역설적인 한가로움은 조선 중기 임제(林悌·1549∼1587) 시에서도 포착된다.


1579년 시인이 함경도 고산역(高山驛)의 찰방(察訪·역참을 관리하는 벼슬)으로 있을 때 쓴 시다. 전반부는 고려시대 윤관이 이곳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9성을 쌓았던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지금은 전쟁의 기미조차 없어 장사는 무료한 듯 낮잠이나 잔다. 변방을 무대로 이민족과의 긴장 관계를 읊는 ‘변새시(邊塞詩)’로선 이색적인 결말이다. 그럼에도 이 시는 당대 허균 형제 등으로부터 호협(豪俠)한 변새시로 높게 평가받았다. 적의 침입을 방비하기 위해 늘 긴장 상태여야 할 장사의 태평스러운 태도가 뜻밖의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흥미로운 건 시인의 다른 시에서도 이런 ‘낮잠 자는 장사’가 등장한다는 것이다(‘遣興’ 첫 번째 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붉은 돼지’(1992년)에도 한가로이 낮잠을 즐기는 전직 공군 비행사가 등장한다. 주인공 마르코는 과거 전쟁영웅이었지만 인간이 되길 거부하고 돼지의 얼굴로 해안의 작은 섬에 숨어 산다. 감독의 개인적 경험이 은둔하는 돼지로 표현된 것처럼, 지식인 사회와 불화하던 시인의 처지가 잠자는 장사에 투영됐다. 시인도 감독도 세상에서 실현하지 못한 혹은 실현할 수 없던 바람을 낮잠 자는 형상에 담아 놓은 듯하다.

이런 창작 배경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작품을 풀어나가는 방식은 결코 딱딱하지 않다. 전쟁과 평화, 바람의 좌절 같은 무거운 주제가 약간의 유머와 곁들여져 희석돼 표출된다. 감독이 파시즘에 저항하는 마지막 이상주의자의 상징으로 ‘붉은 돼지’란 기호를 사용한 것처럼 시인은 현실 속 좌절을 위안받기 위해 ‘낮잠 자는 장사’의 형상을 만들어낸 것이다.

시인은 자신이 중국의 오대(五代)나 육조(六朝)시대 같은 혼란기에 태어났다면 돌림 천자라도 했을 것이라는 왕정을 깔보는 듯한 유언을 남긴 바 있다. 감독 역시 전쟁과 군대에 대한 환멸로 자신의 신념을 고수하겠다는 다짐을 영화에 담았다. 파시스트가 되느니 돼지를 선택한 영화 속 비행사와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해도 아랑곳하지 않는 장사는 감독과 시인의 또 다른 페르소나라고 할 수 있다.

임준철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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