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은진 교수 논문서 이소가야 조명
“패전후 일본인 보복 폭력 당했지만
가해자는 日… 사과해야” 줄곧 주장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본국으로 돌아간 일본인들은 조선민족을 마치 ‘가해자’처럼 생각하며 미움을 가득 안고 조선을 떠난 건 아니었을까.”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의 조선주둔군으로 들어와 약 18년간 한반도에 머문 이소가야 스에지(1907∼1998·사진)는 자신의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그는 “조선민족에 대한 박해의 역사가 있었던 걸 일본인은 얼마나 반성할 수 있을까”라고도 했다. 패전 후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귀국길에 오른 일본인들은 일부 소련군이나 조선인에게 보복 폭력을 당했다. 이에 몇몇 일본 우익 지식인들은 원자탄 피폭과 엮어 일본을 전쟁 피해자로 규정했다. 일례로 후지오카 노부카쓰 전 도쿄대 교수 등은 지난해 12월 독일 베를린에 설치된 ‘평화의 소녀상’ 철거를 위해 “일본과 독일은 연합국의 손에 끔찍한 민간인 손실을 입었는데 이는 전쟁범죄로 해석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소가야는 생전에 “집단 보복을 당해도 어쩔 수 없는 역사적 잘못을 일본인들은 수도 없이 저질렀다”고 했다.
변은진 전주대 한국고전학연구소 HK교수는 최근 발표한 ‘이소가야 스에지의 저술을 통해 본 38도선 이북 지역 일본인의 식민지·귀환 경험과 기억’ 논문에서 이소가야가 일본인들의 ‘피해자 코스프레’를 비판한 배경에 주목했다. 변 교수는 “이소가야는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자신의 양심에 따라 일본 사회의 반성을 촉구했다”고 말했다.
1928년 징집돼 함경남도 나남의 일본군 19사단에 배치된 이소가야는 억압적인 군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2년 만에 제대한다. 이후 일본질소비료주식회사 흥남공장에 취업한 그는 화학물질을 뒤집어쓰며 주야 3교대로 일하는 엄혹한 노동 환경에 처한다. 그가 좌파 항일운동가 주선규(1908∼?), 송성관(1907∼?)을 공장에서 만나 노동운동에 나서게 된 배경이다. 그는 사상범으로 1932년부터 약 9년간 옥고를 치렀다.
일본의 패전 후 그는 조선공산당 인사들과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일본 정부의 요청에 따라 자국민들의 본국 귀환을 도왔다. 변 교수는 “이소가야는 귀환을 도우며 일본인들이 조선인에게 잘못을 저질렀고 사과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고 말했다. 이소가야는 이후 ‘조선종전기’ ‘우리 청춘의 조선’ 등의 저서를 통해 가해자로서 일본의 책임을 강조했다.
“일본은 한국전쟁을 이용해 막대한 어부지리를 얻었다. 이런 일본의 자세는 예전의 군국주의 일본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조선종전기’)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지가 아니었다면 민족 분단이라는 조선민족 최대의 불행을 짊어지지 않았을 것이다.”(‘일한병합 80년과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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