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들의 정신 갈증 풀어주는 깨달음의 두레박

글·사진 서산=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입력 2021-07-17 03:00수정 2021-07-17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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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야기]고승들의 체취 가득 서산
천수만 서산B지구 간척지에 있는 검은여(검은 바위). 간척되기 전 밀물 때 검은 바위들이 마치 바다에 떠 있는 모습이어서 ‘부석(浮石)’이라고 지어졌다. 이곳에서는 매년 4월 3일 주민들의 안녕과 풍년 및 풍어를 기원하는 ‘검은여제’가 열린다.
《코로나19가 불러온 비대면 온라인 사회, 일찍이 겪어보지 못한 4차 산업혁명 시대, 가늠되지 않는 미래…. 혼돈스러운 세상에서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새 시대를 살아갈 혜안과 지혜가 간절한 요즘이다. 바로 그럴 때 찾는 곳 중의 하나가 충남 서산(瑞山)의 ‘상서로운 기운(瑞氣)’이 밴 땅이다. 지금보다 더 고통스럽고 험난했던 일제강점기, 사회의 정신적 등불 역할을 했던 경허(鏡虛·1846∼1912)와 만공(滿空·1871∼1946) 선사 등 선지식(善知識·선종에서 수행자들의 스승을 이르는 말)들의 체취가 강하게 묻어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당시 한국인들의 존경을 받았던 ‘큰어른’들의 행적을 더듬어보는 동안 절로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끼게 된다. 또 그들이 머물고 수행했던 터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힐링할 수 있는 최고의 명당이기도 하다.》

○고승들이 알아본 명당 수행 터

선지식을 만나는 순례는 충남 서산시 천장사(天藏寺)에서 시작한다. 633년 백제 때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이 사찰 입구에 들어서자 ‘최인호 문학의 금자탑 ‘길없는 길’의 무대―천장암’이라는 표지가 바위에 새겨져 있다. 과거 천장암(天藏庵)으로 불린 천장사의 내력도 함께 기재돼 있다. ‘이곳 연암산 천장암은 경허 대선사께서 18년(1886∼1904년)간 주석하신 정신적 도량으로서 그의 수법 제자인 수월, 혜월, 만공이 수행했던 곳입니다. 작가 최인호(1946∼2013)는 그 내용을 주제로 하여 소설 ‘길없는 길’을 썼고, 이로써 천장암은 한국문학사에 길이 전하는 명소가 되었습니다.’

천장사가 근현대 한국 불교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고승들을 배출한 절이라는 자부심이 느껴지는 글이다. ‘천장암’이라고 표기된 인법당(因法堂·승려가 거주하는 공간에 불상을 함께 봉안한 전각)의 공양간 쪽에는 ‘경허 열반 100주년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조선의 억불숭유 정책과 일제의 조선불교 말살정책으로 숨이 끊기기 직전의 한국 불교를 중흥시킨 경허를 기리는 탑이다. 그리고 이 탑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곳이 ‘깨달음의 방’이다. 경허가 1년 동안 방문을 틀어막은 채 장좌불와(長坐不臥·결코 눕지 아니하고 꼿꼿이 앉은 채로 수행하는 방법)한 끝에 깨달음을 원만히 이루었다고 해서 원성문(圓成門) 또는 원구문(圓求門)으로 불리는 방이다.

창문 하나 없는 방 안은 가로 2.3m, 세로 1.3m로 1평(3.3m²) 크기도 되지 않았다. 홀로 눕기에도 비좁아 보이는 방이지만 경허의 수행 향기가 지금도 가득 배어 있는 듯했다. 경허의 방 바로 왼쪽으로는 만공 등 제자들이 스승을 시봉했던 월면당(月面堂)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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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장사 법당에 그려진 경허와 그 제자인 만공, 수월, 혜월 스님.
월면당과 바로 붙어 있는 공양간은 경허의 맏상좌인 수월(1855∼1928)이 불을 때다가 삼매에 들어 방광(放光)을 한 곳으로 유명하다. 산 밑 사하촌 사람들이 절에서 나오는 방광 현상을 발견하고 화재가 난 줄 알고 몰려들었다는 얘기가 지금까지도 전해진다.

고승이 명당을 알아보고 거기서 수행하는 걸까, 아니면 명당 터가 고승을 배출해내는 걸까. 사실 연암산 중턱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자리 잡고 있는 천장암 자체가 대단한 에너지를 갖춘 명당 길지다. 종교를 떠나 누구든 이곳에서 명상이나 수행을 하다 보면 깨침을 얻을 것 같다.

하늘이 숨겨 놓았다는 이름답게 곳곳에 명당이 숨은 듯이 자리 잡고 있는 천장암을 뒤로 하고 비탈길을 따라 하산했다. 그런데 길목에서 만난 표지판을 보고는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경허와 만공의 바랑이쉼터’라는 표지판에 적힌 내용은 이랬다.

경허와 만공이 탁발을 다녀오는 길, 바랑을 멘 만공은 경허의 뒤를 힘겹게 따르고 있었다. 갑자기 경허가 물동이를 인 동네 아낙에게 입을 맞추고 줄행랑을 쳤다. 만공도 정신없이 줄달음쳤다. 산길로 접어든 경허가 길가 널찍한 바위에 걸터앉으며 입을 열었다. “만공아! 아직도 바랑이 무거우냐?”

스승은 무거운 바랑에다 짚신까지 해어져 불평하는 제자에게 축지법으로 편히 가주겠다고 약속했던 참이었다. 그리고 절 아래 마을의 김씨 처녀(김광조 천장사문화해설사 증언)에게 입맞춤한 뒤 마을 사내들로부터 봉변을 피하기 위해 ‘걸음아 날 살려라’ 하는 줄행랑 축지법을 썼다. 바랑이쉼터의 널찍한 바위는 스승이 제자에게 가르쳐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내는 것)’의 현장이다.

○ 한국, 세계일화(世界一花)의 중심 될 것

무학대사가 득도하고 만공이 1000일 기도한 도량인 간월암. 밀물 때는 바닷물에 갇혔다가 썰물 때 육지와 연결되는 지형에 있다.
천장사에서 자동차로 30분 남짓한 거리의 간월암(看月庵)으로 갔다. 경허의 애제자 만공의 기도 기운이 서려 있는 곳이다. 간월암은 밀물 때는 바닷물에 갇혔다가 썰물 때 육지와 연결되는 지형에 있다. 조선 창업주 이성계의 왕사인 무학대사가 득도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만공은 1942년 쇠락한 간월암을 중창불사했다. 간월암 현판도 만공이 쓴 것이다.

만공은 이후 천일기도에 들어갔다. 태평양전쟁 시기 승려에게까지 창씨개명과 징집을 강요하는 일제에 맞서 만공은 일본 순사들의 접근이 어려운 섬의 절집에서 일제의 죄악 7가지(우리말 못 쓰게 한 죄, 징용·징병을 자행한 죄 등)를 멈추게 하고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을 염원하는 기도를 올렸다.

간월암에서 올린 간절한 기도가 통했을까. 천일기도를 마친 지 3일 후인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는 광복을 맞았다. 법당 옆 우거진 나무 그늘 아래 명당 기운이 왕성한 의자에 앉아 그때를 회상해본다. 만공과 함께 기도에 동참했던 이들은 바로 이 절 마당에서 태극기를 들고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감격의 눈물이 비처럼 쏟아졌다. 광복 다음 날인 1945년 8월 16일, 만공은 나라의 상징 꽃인 무궁화의 꽃잎에 붓으로 ‘세계일화(世界一花)’라는 글씨를 썼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요, 이 나라 저 나라가 둘이 아니요, 이 세상 모든 것이 한 송이 꽃이다. 머지않아 이 조선이 ‘세계일화’의 중심이 될 것이다. 지렁이 한 마리도 부처로 보고, 저 미웠던 왜놈들까지도 부처로 봐야, 이 세상 모두가 편안할 것이다.” 그가 남긴 해석이다.

○‘뜬 바위’ 검은여의 전설

부석사의 만공 스님 수행 토굴. 천기와 지기가 교차하는 토굴에 앉아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명상에 빠져드는 느낌을 준다.
간월암에서 자동차로 18km 거리에 있는 서산 부석사(浮石寺)에도 경허와 만공의 자취가 남아 있다. 신라 의상대사가 창건한 이후 조선의 무학대사가 중창한 부석사에는 만공이 수행하던 토굴이 있다. 또 부석사가 위치한 도비산(351.6m)의 지맥(地脈)이 간월암까지 이어진다. 두 절은 땅 인연으로도 이어지는 것이다.

‘제2의 원효’라고 불릴 정도로 무애행(無애行)을 하던 경허는 만공이 수행하던 부석사를 즐겨 찾았다고 한다. 부석사 내 심검당(尋劒堂·지혜의 칼을 찾는 곳)과 목룡장(牧龍莊·용처럼 비범한 인재를 키워내는 곳) 현판 글씨는 경허가 직접 썼고, 부석사 현판은 만공의 작품이다.

소가 누워 있는 모습으로 지어진 부석사에서 소 젖가슴 부위에 해당하는 약수.
경허가 머물렀다는 심검당 툇마루에 앉았더니 만공의 토굴 기도 터 못지않게 기운이 예사롭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심검당 돌계단 바로 아래쪽 약수터 또한 명당의 기운을 받은 덕분인지 물맛이 남달랐다. 부석사 도량 자체가 퍼질러 누운 소의 형상으로 지어졌고, 약수터는 소의 젖가슴에 해당한다는 풍수적 해석도 있다. 이에 따르면 약수는 유즙(乳汁)에 해당할 것이다.

부석사는 절의 규모는 작지만 역사가 깊은 절이다. 경북 영주의 부석사와 이름 및 창건설화마저 똑같다. 사찰의 산신각에는 이를 증명하듯 중앙에 산신, 우측과 좌측에 각각 선묘 낭자와 용왕을 모셨다. 일반 사찰에서는 잘 볼 수 없는 배치다. 선묘 낭자는 부석사 창건 설화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의상을 흠모했으나 사랑 고백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바다에 몸을 던졌고 이후 용이 돼 의상의 불사(佛事)를 도왔다는 중국 당나라 때 여인이라고 한다.

‘공중에 뜬 돌’이라는 의미를 가진 ‘부석’사의 전설을 뒷받침하는 바위도 있다. 천수만 간척지역에 있는 검은여(검은 바위·서산시 부석면 갈마리 소재)다. 간척이 되기 전까지 서해 바닷물은 밀물 때 도비산 아래까지 이르렀는데, 그때 검은여가 마치 바다에 떠 있는 듯하다 해서 ‘부석’이라고 지어졌다고 한다. 검은여 소재지인 부석면의 지명도 여기서 유래한다.

한일 간 분쟁으로 제자리를 찾아가지 못하고 있는 부석사 금동관음보살좌상.
부석사는 2012년 일본 쓰시마섬 관음사에서 절도범에 의해 국내로 밀반입된 금동관음보살좌상의 원 소장처다. 현재도 소유권 문제로 한일 간 재판이 진행 중인 불좌상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길 바란다. 모든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유물은 원래 터에 있을 때 제 빛을 발할 수 있다. 명당에는 그에 걸맞은 주인이 자리를 잡아야 하는 게 순리다.




글·사진 서산=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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