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상 가장 낮은 곳으로…” 박완서 글로 하루를 여는 사람들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월 19일 03시 00분


코멘트

박완서 타계 10주기… 매일 아침마다 소설-산문 필사
“친근하고 낮은 곳에 있는 글”
여성-노인-가난한 사람들 처지,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확장시켜
“오래도록 사랑 받는 이유는”

“박완서 작가의 글은 어릴 때 같이 놀려고 까치발을 들고 보던 친구네 마당 같아요.”

6개월째 박완서 작품 필사 모임 ‘박완서가 그리울 때’에 참여하고 있는 이도화 씨(48·여)에게 작가의 글은 친근하고도 낮은 글이다. 화려한 문장들로 몰아치는 글을 쓰는 작가들은 때로 문학의 벽을 높인다. 하지만 박완서의 글은 까치발만 들어도 훤히 내다보일 정도로 가깝고 낮은 곳에 있다.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 노인, 가난한 사람들의 처지를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확장하는 힘이 박완서 작품의 미덕이다.

22일로 박완서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된다. 하지만 여전히 아침마다 그의 글을 읽고 쓰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다. ‘박완서가 그리울 때’는 2019년 1월 류경희 씨(52·여) 주도로 시작됐다. 토론수업 프리랜서 강사로 활동하던 류 씨에게 어느 날 문득 찾아온 작가를 향한 그리움이 계기가 됐다.

“‘원로 작가가 아닌 당대의 가장 젊은 작가를 잃었다’는 신형철 평론가의 글이 너무나 와닿았어요.”

그 후로 3년 동안 매일 아침마다 필사한 문장과 감상평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회원들과 주고받고 있다. 회원들은 무직자부터 정육점 사장, 회사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면서도 평범한 독자들이다.

류 씨는 2005년 출간된 단편소설 ‘촛불 밝힌 식탁’의 의미가 요즘 새롭게 읽힌다고 했다. 노년을 아들 부부와 함께 보내고 싶은 노부부가 아들 집 근처로 이사하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노부부와 아들, 며느리 누구 하나 선하거나 악하지 않지만, 서로 계속 부딪친다. 결국 가족들의 갈등은 해소되지 않고, 거절당한 노부부의 스산한 마음이 독자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류 씨는 “박완서 작품의 주제는 언제나 ‘사람의 마음’이어서 세월이 지나도 녹슬지 않는다”고 했다.

이 씨는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에 실린 ‘나는 다만 바퀴 없는 이들의 편이다’를 추천했다. 남한산성으로 피신하는 인조보다, 왕의 행렬 맨 뒤에서 바퀴 없이 걸어야 했던 백성들의 모습에 더 마음 아프겠다는 박완서의 선언이 담겼다. 이 씨는 “국정을 운영하는 사람들도 가장 먼저 돌아봐야 할 사람들을 돌봤으면 한다”고 말했다.

20, 30대 독자들에게조차 젊은 작가의 글보다 더 편안하게 읽힌다는 점도 다른 작가들이 범접하기 힘든 박완서 문학의 매력이다. 김경은 씨(39)는 “젊은 작가들의 잔뜩 꾸며진 글을 읽다 보면 편안하지 않다는 느낌이 든다. 박완서의 문장은 쓰인 게 아니라 터져 나왔다는 표현이 걸맞을 정도로 편안하고 자연스럽다”고 말했다.

후배 작가들도 박완서 글의 생명력은 여전하다고 말한다. 생전 박완서 작가와 친분이 두터웠던 정이현 작가는 “최근 선생의 작품을 다시 훑어봤는데 2021년에 읽어도 그가 던진 질문들이 유효하다는 생각에 다시금 놀랐다”며 “자전 소설인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와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를 20대 여성들에게 추천한다. 한국에도 일찍이 여성의 ‘증언 문학’이 있다는 점은 우리에게 축복”이라고 말했다.

“물려주신 부엌에서 많은 시간 보냈다”
맏딸 호원숙 작가 산문집 발간
‘노란 집’서 보낸 모녀간 추억 담아


호원숙 작가(사진)가 어머니 박완서 작가 타계 10주기를 맞아 모녀간의 추억을 되새긴 산문집 ‘정확하고 완전한 사랑의 기억’(세미콜론)을 22일 출간한다.

박완서의 맏딸인 호원숙 작가는 이번 산문집에서 어머니가 물려주신 ‘노란 집’의 부엌을 중심으로 박완서와 얽힌 추억을 도란도란 풀어 놓는다. 박완서의 소설집 제목이기도 한 ‘노란 집’은 작가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살았던 경기 구리시 소재 집이다.

호원숙 작가는 책 서두에 “어머니가 물려주신 집의 부엌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썼다. 어머니가 떠난 집에서 미나리를 다듬고 만두를 빚으면서 어머니를 떠올렸다고 했다. 책에 실린 산문에는 오직 딸이기에 가능한 ‘박완서 문학’에 대한 감상이 실려 있다.

출판사 현대문학은 10주기를 맞아 박완서의 자전적 연애 소설이자 마지막 장편인 ‘그 남자네 집’ 개정판을 22일 출간한다. 일흔을 훌쩍 넘긴 작가가 수십 년 동안 가슴에 소중히 품어온 첫사랑의 기억을 풀어놓은 작품이다. 개정판엔 호원숙 작가의 헌사와 이해인 수녀, 구효서 작가 등이 2011년 쓴 추모사 등이 담겨 있다.

웅진지식하우스는 자전 장편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와 후속작인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개정판을 22일 펴낸다. 박완서의 유년 시절과 성년의 기억을 망라한 두 작품은 작가에게도 독자에게도 큰 사랑을 받았다.

문학동네는 박완서의 수필을 모아 10주기 기념 산문집 세트를 11일 출간했다. 1977년 첫 산문집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부터 1998년 나온 ‘어른 노릇 사람 노릇’에 수록된 글까지 총 465편의 산문을 골랐다.

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박완서#10주기#필사#호원숙#신간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