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플래시100]“악당 소설을 쓰려거든 혈등 지옥골의 참상을 보라”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0월 3일 11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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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8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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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7월 26일 일본 신석현(니가타 현) 첩첩산중 혈등 마을의 한 주민은 수력발전 공사장 인부 4, 5명이 조선인에게 큰 돌을 매달아 절벽 아래 강물에 내던지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깜짝 놀란 주민은 신문사에 제보했고, 요미우리신문은 현장을 취재해 29일 ‘신농천에 자주 떠내려 오는 조선인의 학살 시체’라는 기사를 내보냅니다.
조선인들이 갖은 학대를 당하며 노동을 착취당했던 일본 나리타 현 혈등 지역의 수력발전 공사현장. 산 밑 오른쪽 빈터에 ‘반장’, 일명 ‘지옥실’이라 불렸던 노동자들의 숙소가 있었다. 1991년 동아일보 창간기념호에 실린 사진이다.
조선인들이 갖은 학대를 당하며 노동을 착취당했던 일본 나리타 현 혈등 지역의 수력발전 공사현장. 산 밑 오른쪽 빈터에 ‘반장’, 일명 ‘지옥실’이라 불렸던 노동자들의 숙소가 있었다. 1991년 동아일보 창간기념호에 실린 사진이다.

동아일보는 8월 1일자에 ‘일본에서 조선인 대학살/ 보아라! 이 잔인 악독한 참극을’이란 외신 발 기사를 보도하며 이 충격적인 소식을 국내에 처음 알렸습니다. 공사장 일본인들이 하루 17시간 강제노동을 못 견디고 도주하는 조선인을 육혈포로 사살해 신농천에 던졌는데, 지금까지 참살당한 사람이 100명 이상이라고 전한 겁니다. 조선총독부는 즉시 이 기사를 압수했습니다.

사흘 뒤에는 조선인 학살은 사실이 아니라는 총독부 해명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런데 이 역시 압수당했습니다. 해명은 좋은데 ‘왜 요미우리는 놔두고 동아일보만 문제 삼는지’ 따진 것이 심기를 건드린 겁니다. 또 특파원을 보내 진상조사를 하려 했지만 취재를 방해할 것이고, 조사결과를 신문에 실을 수 없을 것이며, 간도참변을 취재하다 (일제에 의해) 돌아올 수 없는 몸이 된 장덕준 기자의 전철을 밟을까봐 중지했다고 쓴 것도 총독부로서는 참기 힘들었겠죠.
신석현 조선인 학살사건 조사회가 1922년 9월 27일 경성 경운동 천도교당에서 개최한 보고회에 몰려든 1000여 명의 군중. 동아일보 이상협 특파원과 함께 현장 진상조사를 하고 돌아온 나경석의 연설 후 조사회는 이 단체를 상설화할 것을 가결하기도 했다.
신석현 조선인 학살사건 조사회가 1922년 9월 27일 경성 경운동 천도교당에서 개최한 보고회에 몰려든 1000여 명의 군중. 동아일보 이상협 특파원과 함께 현장 진상조사를 하고 돌아온 나경석의 연설 후 조사회는 이 단체를 상설화할 것을 가결하기도 했다.

하지만 동아일보는 용단을 내려 6일 편집국장 이상협을 특파원으로 파견합니다. 먼저 도쿄로 간 이상협은 정부 관리들을 만났는데 이들은 “사실무근”이라고 일관했습니다. 요미우리신문도 당국의 함구령을 이유로 도와주지 않았죠. 하지만 혈등 공사업체 임원을 추궁한 끝에 “‘지옥실’이라고도 하는 반장(飯場) 제도로 노동자들을 단속한다”는 답변을 끌어냅니다. 실마리를 잡은 이상협은 각각 경성과 도쿄에서 결성된 신석현 조선인학살사건 조사회의 나경석, 김약수와 ‘지옥의 골짜기’, 혈등으로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그러자 신석현 경찰은 물론 도쿄의 내무성, 발전소를 짓는 신월전력에서도 혈등에 출장해 사실을 조사한다며 법석을 피웠습니다. 말이 조사지, 실제로는 현장 조선노동자 867명의 입을 막으려던 속셈이었겠죠. 결국 이상협은 학살의 확증을 찾아내진 못했지만 이들의 처참한 상황을 낱낱이 밝혀 8월 23일자부터 ‘신석의 살인경-혈등 답사기’라는 12회 르포를 실었습니다.

이에 따르면 일본인들은 조선에서 노동자를 모집할 때 하루 8시간 노동에 월 80원을 주는 외에 월 2일 휴가 보장, 질병 치료비 및 사망위로금 지급 등을 명시한 계약서를 작성했지만 새빨간 거짓이었습니다. 그나마 까막눈이라며 계약서도 주지 않았죠. 공사현장에는 전력회사 아래 하청업체, 그 아래에 큰 두목, 작은 두목, 십장이 줄줄이 도사리고 있어 얼마 되지 않는 품삯을 단계마다 떼어먹었고요. 음식 냄새, 땀 냄새, 똥오줌 냄새가 진동하는 숙소(반장)는 주로 작은 두목들이 관할했는데 하나뿐인 출입문에 자물쇠를 채워 유치장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죽어나가는 동료들을 지켜보다 탈출하려 해도 등 뒤는 험한 산, 앞은 깊은 신농천이라 쉽지 않았습니다. 간신히 벗어나더라도 기차를 타려면 100리 넘는 길을 가야 하는데 곳곳에 두목의 심복들이 눈을 부라리고 있어 잡혀오기 일쑤였습니다. 두목과 그 하수인들은 도주하다 잡힌 조선인을 나무에 묶어 수십 시간 때리는 것은 예사고, 쇠갈고리로 몸을 찍고 소금물을 뿌리거나, 발가벗긴 몸에 콘크리트를 부어 산 채로 굳히는 사형(私刑)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일본 신석현 조선인노동자 학살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기 위해 1922년 일본에 파견됐던 이상협 특파원. 동아일보 창간의 주역이자 초대 편집국장이었던 그는 이듬해 간토 대지진 때도 일본에 건너가 눈부신 활약을 했다.
일본 신석현 조선인노동자 학살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기 위해 1922년 일본에 파견됐던 이상협 특파원. 동아일보 창간의 주역이자 초대 편집국장이었던 그는 이듬해 간토 대지진 때도 일본에 건너가 눈부신 활약을 했다.

이상협은 “우리도 울고, 그도 울고, 솔바람도 슬퍼하고, 물소리도 목이 메었다”며 탄식하며 “소설가가 악한을 연구하고 싶다면 이곳을 찾아오는 게 제일 빠른 길”이라 하기도 했습니다.

일련의 동아일보 고발기사와 신석현 사건 조사회의 활동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켜 항일 분위기를 고조시켰고,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에 대한 일반의 관심도 점차 높아졌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조선인 노동착취는 갈수록 심해져 중일전쟁 후 강제징용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정경준 기자 news91@donga.com

과거 기사의 원문과 현대문은 '동아플래시100' 사이트(https://www.donga.com/news/donga100)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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