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플래시100]탕!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저격한 한국인의 운명은…

이진 기자 입력 2020-09-30 11:40수정 2020-09-30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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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7월 2일
플래시백
1922년 3월 28일 중국 상하이 부두에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가 도착했습니다. 필리핀을 방문한 뒤 돌아가는 길이었죠. 다나카는 조슈 군벌에 속하는 군부 거물이었습니다. 육군대신이던 1920년에는 ‘간도 불령선인 초토화계획’을 세워 지휘했죠. 그 결과 만주에 있던 수많은 조선동포들이 학살당한 경신참변이 일어났습니다.

부두에는 환영객들만 기다리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한국인 3명도 있었죠. 다나카가 배에서 내려서자 갑자기 탕! 탕! 탕! 총성이 울렸죠. 하지만 총탄은 앞서나오던 미국인 여성이 맞고 맙니다. 급하게 차 안으로 피하는 다나카에게 다시 총탄 두 발이 발사됐고 폭탄도 날아들었죠. 하지만 총알은 모자를 뚫고 나가는데 그쳤고 폭탄은 터지지 않았습니다. 다나카의 차에 다시 폭탄이 날아갔지만 역시 불발이었죠.

①은 의열단이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저격했던 상하이 부두. ②는 1차 저격에 나섰던 오성륜 ③은 2차 저격을 맡았던 김익상 ④는 최후 저격을 책임졌던 이종암. ②와 ④는 의열단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제공.


다나카 저격은 한국인 3명이 차례차례 시도했습니다. 오성륜이 1선, 김익상이 2선, 이종암이 3선을 각각 맡았죠. 세 사람 모두 의열단 소속이었습니다. 이들은 거사 계획 때 저마다 자기가 다나카를 처치하는데 앞장서겠다고 나섰습니다. 의열단 단장 김원봉과 의논 끝에 명사수 오성륜이 1차로 시도하고 김익상과 이종암이 뒤를 잇기로 결정했죠.

주요기사
오성륜은 바로 붙잡혔고 김익상은 뒤쫓아 오던 영국 경찰이 쏜 총에 맞고 체포됐습니다. 두 사람이 경찰의 시선을 끌면서 이종암은 무사히 몸을 피할 수 있었죠. 그런데 오성륜은 상하이 일본총영사관 감옥에 있다가 한 달 가량 지나 일본인 죄수와 함께 극적으로 탈옥에 성공했습니다. 일제는 김익상마저 놓칠까봐 나가사키로 압송했죠. 그런데 조사를 거치면서 일제를 깜짝 놀라게 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동아일보는 김익상의 거사를 저격 때부터 줄곧 보도했다. 거사부터 사형 판결까지 주요 기사 제목을 오른쪽부터 시간 순으로 배치해 보았다. 당시 취재가 어려웠던 탓인지 김익상의 한자 이름이 틀리기도 했고 오성륜을 오상륜으로 표기하기도 했다.

1년 전 9월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진 뒤 귀신같이 사라진 사람이 바로 김익상이었던 것이죠(동아플래시100 7월 21일자 참조). 그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글을 읽으면 머리가 아파 공부는 하지 않았으며 연초공장에 다니다 꿈꾸던 비행사가 되려고 상하이로 갔다고 말했죠. 중국 내란으로 비행기학교가 없어져 여기저기 떠돌다 김원봉을 만나 독립운동에 투신했다고 밝혔습니다.

김익상은 재판 때도 자신의 의열투쟁을 웃으면서 당당하게 시인했습니다. 그는 “총독부에 폭탄을 던진 뒤 큰 영향이 없자 한걸음 더 나아가 일본과 조선 대관을 암살하려고” 했다고 말했죠. 또 “어떤 형벌이든지 사양하지 않을 터이며 나의 수령과 동지는 말할 수 없으나 이후로 제2 김익상, 제3 김익상이가 뒤를 이어 나타나 조선독립을 이룰 때까지 일본 대관 암살을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동아일보는 국내 신문 중 유일하게 기자 유광렬을 특파해 재판 과정과 김익상의 발언을 상세하게 보도했습니다.

김익상은 1심에서 무기징역, 2심에서 사형이 선고돼 그대로 확정됐습니다. 이후 일본 황태자 결혼식 때 무기징역으로 감형, 천황 즉위식 때 20년으로 또 감형됐습니다. 축하의 뜻으로 일괄적인 감형혜택이 적용됐던 것이죠. ‘약산과 의열단’ 책에 따르면 그는 1942년 집으로 돌아왔지만 더 이상 27세 피 끓는 청년이 아니었습니다.

①과 ②는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에 붙어 있는 김익상과 그의 동생 김준상. ③은 동아일보 1926년 2월 17일자 <떡국을 끌여노코(2)>에 소개된 김익상의 동갑내기 아내 송 씨. ①과 ②는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김익상의 목숨 건 투쟁의 대가는 가족에게도 큰 희생을 불러왔죠. 총독부 공격 때 들렀던 동생 김준상은 경찰에 고초를 겪었고 이후 생활고에 시달리다 1925년 아내만 남겨둔 채 세상을 등졌습니다. 김익상의 동갑내기 아내 송 씨는 1926년 설에 동아일보에 “(남편을) 생전에 만나볼 것 같지 않아요. 이것(3세 딸)이나 알뜰히 키울랍니다”라고 말했죠. 김익상이 출옥했을 때 아내는 딸과 함께 어디론가 떠나버린 뒤였습니다. 김익상 본인은 이내 일본 형사에게 연행된 뒤 영영 소식이 끊기고 말았죠. 그의 나이 47세 때였습니다.

이진 기자 leej@donga.com

원문
公開(공개)된 爆彈事件(폭탄사건)의 眞相(진상)
少毫(소호)도 隱諱(은휘) 업시 明快(명쾌)히 陳述(진술)
金益相(김익상) 第一回(제1회) 公判(공판) 詳報(상보)
長崎(장기)에서 特派員(특파원) 柳光烈(유광렬) 發電(발전)
작년 구월 십이일 백주에 총독부에 폭탄을 던지어 세상을 놀내이고 금년 삼월 이십팔일에 상해 부두에서 뎐중(田中) 대장(大將)을 저격한 김익상(金益相)의 공판은 삼십일에 댱긔(長崎)에서 열니엇다 함은 작지에 임의 보도한 바어니와 본사에서는 이 사건을 특히 자세히 보도하기 위하야 그곳까지 사원을 특파한 바 이제 그 공판의 자세한 뎐보가 왓기로 이에 보도하는 바이다.

백주에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지어 일시 세상의 이목을 놀내이고 상해(上海) 부두에서 일본 군벌의 거두 뎐중(田中) 대댱(大將)을 또 저격한 김익상(金益相)의 공판은 예뎡과 갓치 삼십일 오전 구시 사십분에 댱긔디방재판소(長崎地方裁判所)에서 송뎐(松田) 재판댱과 강뎐(岡田) 석교(石橋) 량 배석판사와 석천(石川) 검사가 렬석한 후 개뎡되얏다. 김익상은 풀은 미결수의 옷을 입고 벙글々々 웃는 낫으로 의긔가 충텬한 듯한 태도로 안저서 자조 방텽석과 신문긔자석을 도라보며 은근히 눈인사를 한다. 송뎐 재판댱은 먼저 피고의 주소 성명과 출생디(出生地)와 전과(前科)의 유무를 물은 후 립회한 석천 검사가 예심걸뎡에 긔재된 사건에 대하야 재판을 청구한다 하고 안즈매 재판댱은 다시 심리를 계속하야 피고의 신분과 학력(學歷)은 엇더하냐 하매

總督府(총독부) 投彈(투탄)의 動機(동기)
본래의 소원은 비행학교
의렬단 수령의 말에 격동
나의 모친은 나의 열세 살 때에 죽고 나의 부친은 나의 스물한 살 때에 죽엇스며 교육은 별로 밧지 아니하얏소. 그 리유는 글을 읽으면 머리가 압허서 공부를 아니한 것이라 하며 슬적 우슴을 먹음고 다시 부친은 일본사람과 가치 재목상사를 경영한 일이 잇섯는대 일본인에게 속아서 재산을 탕진하얏고 그 다음에 나는 어리엇슬 때에 평양(平壤)에서 텰공견습(鐵工見習)을 하얏고 광성연초공사(廣成煙草公司)의 긔계감독(機械監督)으로 작년 륙월에 봉텬(奉天)에 이르러 본즉 직업에는 별로 흥미가 업고 어렷슬 때부터 소원인 비행긔학교(飛行機學校)에 입학하기 위하야

그때 가치 일을 보든 송병휘(宋秉輝)와 함끠 엽연초(葉煙草)를 횡령하야 상해(上海)로 갓다가 다시 상해에서 텬진(天津)으로 갓다가 다시 그곳에서 광동(廣東)으로 갓섯스나 그때 마츰 중국의 남복전쟁(南北戰爭)이 한참임으로 비행긔학교는 폐지되얏슴으로 할 수 업시 상해를 것치어 북경(北京)으로 가서 조선독립운동을 목뎍하고 북경에 잇는 의렬단(義烈團)의 수령 김약산(金若山)을 맛나매 그는 말하되 『조선의 독립은 이천만 민족의 십분지팔 이상이 피를 흘니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우리는 이때에 선두에 나아가 희생이 됨이 맛당하다』함을 듯고 나는 비상히 감격하야 그해 구월 구일에 김약산에게서 폭발단 두 개와 단총 두 개를 바다가지고 즉시 암살에 착수히얏다.

日本(일본) 勞働者服(노동자복)으로
총독부에 투탄하든 사실 뎐말
당시에 경계가 엄중함으로 나는 일본인으로 변장하고 목다리(立襟)양복 속에 폭탄과 단층을 감추어 가지고 구월 십일에 북경을 떠나 십일일에 경성에 도착하야 하루밤은 아우의 집에서 쉬이고 십이일 오전 중에 일본 로동자 복색을 하고 『다비』를 신고 폭탄을 바지 속에 감추고 총독부로 갓셧스나 정문은 경계가 엄중함으로 뒤문으로 들어가서 이창으로 올나가 먼저 비서과(秘書課)에 폭탄을 던지고 두 번 재 회계과(會計課)에 던지엇는대 폭탄은 일시에 폭발함으로 나는 그 광경을 보며 즉시 아래칭으로 나려간즉 수 명의 헌병(憲兵)이 옴으로 나는 『이칭으로 올나가며 위태하다』는 말을 하고 즉시 다라낫다.

投彈(투탄) 理由(이유)
일인을 각성식히고자
폭탈은 해삼위의 제조
재판댱은 다시 『폭탈은 어대서 낫느냐. 김약산이가 만들은 것이냐』 물으매 『김약산의 말을 들으면 해삼위(海蔘威)에서 수입한 것이라는대 내가 본 것만 하야도 이백여 개의 폭탄이 잇섯소』라고 대답하고 그 다음에는 폭탄제조에 대한 피고의 설명이 잇고 총독부에 갓슬 때에 공범자(共犯者)가 잇셧느냐 물으매 『공범자는 업스나 긔차 중에서 일본 녀자와 이런 말 저런 말을 하야 교묘히 부々가 동행하는 것처럼 하야 경관의 검사를 면하얏고 남대문에 나리어서는 폭탄을 몸에 진이엇슴으로 자유로 걸을 수도 업고 봉텬에서 온 조선사람은 모다 검사를 함으로

나는 동행하든 일본 녀자의 세 살 가량 된 아해가 매우 귀여움으로 혼잡한 중에 아해를 안아 주겟다고 그 아해를 안고 뎡거장 구내에서 오래동안 거닐다가 경관의 검사를 면하얏고 폭탄을 던진 후에 보통 려관으로 갓다가는 경관의 수사가 심할 터임으로 일본 료리집으로 들어가서 대정쟁이의 옷을 한 벌 사 입고 긔차를 타고 신의주(新義州)로 가서 경관이 취조함으로 나는 일본사람인대 대판(大阪) 남구(南區) 대화뎡(大和町)에 사는 삼뎐신(三田神)이라고 함부로 주어대어 경관을 속히고 겨우 피하엿다』 총독부에 폭탄을 던진 리유는 무엇이냐 하매 『처음에는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지어 크게 일본인을 반성케 하고 각성(覺醒)케 하랴고 생각하고 구월 십칠일에 북경에 도착하야 김약산을 맛나 전후 사실을 말하얏다』

上海事件(상해사건)의 顚末(전말)
탄환은 빗맛고 폭탄은 안 터저
도망 즁에 탄환을 맛고 잡히여
그 후에 뎐중(田中) 대장(大將)을 저격한 경과에 대하야 진술하얏는대 『총독부에 폭탄을 던진 후에 큰 영향이 업슴을 보고 한거름 더 나아가서 일본 대관과 조선 대관을 암살하랴고 생각하고 금년 이월 이십일에 북경을 떠나 상해로 가서 김약산과 장래에 하야 의론을 하는 중에 동지 오성륜(吳成崙)을 맛낫는대 그때 마츰 뎐중 대장이 비률빈(比律賓)에서 상해로 온다는 보도가 잇슴으로 크게 깃버하야 신문에 난 사진을 보고 뎐중의 상륙함을 기다리고 잇는 중에 『삼월 이십팔일』 오후 삼시 삼십분에 상륙한다 함으로 나는 양복에 단총 한 개와 폭탄 한 개를 감추어 가지고 오성륜은 단총 한 개를 가지고 부두로 나아가서 오성륜이가 먼저 단총을 쏘앗스나 탄환이 뎐중에게 맛지 아니하고 그 겻헤 잇든 영국부인에게 마젓스며 나는 폭탄을 던지엇스나 화약이 낫버서 폭발되지 아니하고 그 겻헤 잇든 순사가 그것을 주서서 물에 던지엇다.

나는 일이 랑패됨을 보고 그 자리를 피하랴 할 때에 중국 순경이 달녀들음으로 나는 쫏차오는 순경을 위협하기 위하야 공중을 향하고 총을 한 방 노앗더니 맛지도 아니하고 놀내어서 순경이 쓸어지는 것을 보고 다시 구강로(九江路)를 지나 사천로(四川路)로 다라나는 중에 『톰손』이라는 영국 사람이 나에게 륙혈포를 노아 나의 손과 발에 마젓슴으로 엇지할 수 업시 손발을 버둥거리는 중에 다시 탄환은 외인편 가슴에 마저 넘어지매 다수한 영국 순사와 중국 순경이 쫏차와서 톄포되얏다』고 진술하매 재판댱은 다시 중국 순경에게 총을 노흘 때에 그를 죽일 목뎍으로 노흔 것이 아니냐고 물으매 피고는 랭소를 하며 『우리에게 아모 관계도 업는 중국인을 죽일 필요는 업고 오즉 위협을 하기 위하야 노흔 것이오. 만약 뎐중에게 노앗다 하면 그야 물론이오. 하늘을 견주고 노흔 것은 사실이라』고 그때 총 놋튼 흉내를 내이며 또 웃는다. 이때에 방텽석에서도 우슴소리가 이러낫다. 재판댱은 다시 오성륜의 탄환이 뎐중 대장에게 마젓스면 그대는 폭탄을 던지지 아니할 생각이엇느냐 물으매 『아니오. 오성륜의 탄환이 맛더래도 나는 나의 폭탄을 뎐중에게 던지랴고 각생하얏소』

滿員(만원)의 傍聽席(방청석)
조선 긔자는 한 명뿐
방텽석에는 수 명의 경관이 경계하며 댱긔현 순사교습소(巡査敎習所)의 교습생 륙십여 명의 방텽도 잇셧스며 보통 방뎡석에는 조선인과 일본 청년이 립추의 여디도 업시 들어안고 문밧게도 들어오지 못한 사람이 수십 명이며 신문긔자석에는 동경 대판의 각 큰 신문 통신원과 댱긔 유수한 신문긔자가 늘어 안저서 밧비 붓대를 놀니는대 조선에서 온 긔자는 오즉 한 사람뿐이다.

檢事(검사)의 分離請求(분리청구)
총독부사건은 경성에서
따로 심리해 달나는 쳥구
뎐중 대장을 저격한 폭탄의 위력은 과연 엇더한가. 그 폭탄을 중국 순경이 주서서 바다물에 던지엇슬 때에 폭발되얏스면 엇더하얏슬가. 그 폭탄은 던진 후에 일 분 이상이 지나서 폭발하지 아니하면 폭발하지 아니하는 것임으로 물에 던지엇슬 때에는 아모 관계도 업섯다. 뎐중 대장에게 던진□ 폭탄의 출처는 엇더한가. 역시 해삼위에서 수입한 것인대 김약산에게서 어든 것이오. 뎐중을 죽이랴 한 뜻은 무엇인가.

뎐중뿐 아니라 일본 대관은 모다 죽이랴 한 것이라고 심리를 진행하는 중에 석천검사로부터 피고의 범죄 중 뎨이의 사실 즉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진 사실은 조선총독부에 부속되는 경성디방법원(京城地方法院)에서 심리하야 달나는 청구가 잇슨 후 재판장은 잠간 휴게를 하겟다고 선언하고 법관 일동은 합의(合議)를 하기 위하야 퇴석하얏는대 이때에 뎐변(田邊) 변호사로부터 검사의 청구를 설명하야 주면 피고는 어대던지 가겟다고 매우 뱃심이 든々한 태도로 말하얏다. 법관 일동은 잡시 합의한 후 열한시 오십분에 다시 착석하야 재판댱은 검사의 청구는 다음에 결뎡하겟다고 선언하얏다.

被告(피고)의 利益點(이익점)은
『조선의 독립』
오전 중 심리 종료
다시 심리를 계속하야 봉텬에서 입담배 횡령한 사건의 취조와 총독부에 폭탄을 던진 사건에 대한 경관의 보고서와 피고의 탄환에 상한 영국인 『톰손』의 조서(調書) 폭발탄을 던지든 때의 모양과 기타의 증거 조사긔록을 읽고 피고의 동의(同意)를 어든 후 무엇이던지 피고에게 리익되는 증거가 업느냐 하매 피고는 또 벙글々々 우스면서 『나의 리익되는 뎜은 조선독립이라』고 말하야 재판댱을 놀내이게 하얏다. 정오에 재판관 일동은 잠간 휴게를 선언한 후 퇴석하얏다.

審理(심리)는 大體(대체) 終了(종료)
쾌활한 김익상
김익상은 몸에 푸른 미결수의 옷을 입고 머리는 오분(五分)으로 깍고 얼골은 약간 야위인 듯하나 피곤한 빗이 업시 생긔가 펄々한 눈으로 재판댱의 심문에 일사텬리의 형세로 공술을 하얏다. 오전 중에 대톄의 심리는 맛친 모양이다. (삼십일 오후 령시반 댱긔발)

次回(차회) 公判(공판)은 未定(미정)
중국 순경 등을
증인으로 취조
오후 네시 이십분에 계속 개뎡하야 송뎐 재판댱으로부터 증인으로 상해의 중국 순경과 당시에 총을 마진 영국 부인의 남편 『톱손』을 조사하기 위하야 상해령사관에 위탁하고 조선총독부에 던진 포탄을 분해(分解)하야 감뎡(鑑定)하기를 조선종독부에 부탁할 일을 말하고 다음번 공판은 날자를 뎡치 아니하고 즉시 페뎡하얏다. 이로써 사실심리의 대강을 맛치고 다음 공판은 상해와 조회(照會)하는 일자의 관계도 잇슴으로 약 일개월 후에나 될듯하며 또 조선종독부에 폭탄을 던지 사건만을 경성디방법원에서 분리하야 심리한다는 문뎨도 다음에 결경하리라 하며 사실을 심리할 때에 김익상이가 (톱손)을 쏘흔 것은 본의가 아니라 자긔가 일이 랑패된 것을 보고 자살하랴고 총을 노흔 것이 잘못되야 『톱손』에게 마진 것이라고 진술함에 대하야 검사로부터 자세한 사실을 심문하야 달나하얏스나 이에 대하야는 아모 심문도 업섯다.
(삼십일 오후 륙시 댱긔발)
김익상이가 톄포 당시 영국인 『톰손』에게 총을 노앗든 사실이 이전 뎐보에 뎐문이 분명치 못하얏기 독자의 짐작을 바라옵

話題(화제)된 其(기) 大膽(대담)
신문의 대서특서
공판뎡에서 본 김익상의 대담한 태도에 대하야 댱긔의 각 신문은 비상히 큰 글자로 긴 뎨목을 부처서 이 사건을 자세히 보도하기에 한 장을 거의 다 허비하얏스나 댱긔 시내의 도처에서는 일본인 사이에도 큰 리여기거리가 되얏더라.

分離(분리)를 請求(청구)한 理由(이유)
사실조사가 미상한 까닭이라고
분리를 쳥구한 담임검사의 의견
김익상이가 경성의 총독부에 폭발탄을 던진 사건은 경성에서 다시 재판하도록 따로히 분리하야 달라고 검사가 청구한데 대하야 그 청구를 한 담임검사 석천(石川) 씨는 말하되 □본래 김익상의 범행은 봉텬 경성 상해의 세 곳에서 행한 바로 상해령사관에서는 규뎡에 의지하야 댱긔 디방재판소에 보내여 온 것인데 이와 가치 범행이 여러 곳의 재판소 관활이 되는 때에는 형사소송법(刑事訴訟法) 뎨이십칠조에 의지하야 그 사건을 최초 공판에 착수한 재판소에서 관활하게 되얏슴으로 댱긔에서 전부의 재판을 못할 것도 아니나 대정 칠년 사월에 발포된 공통법(共通法) 뎨십칠조로 보면 이러케 사건을 분리하야 총독부 폭발탄사건은 그 관활재판소인 경성디방법원에 보내일 수도 잇게 되얏슴으로 이에 의지하야 분리를 청구한 것이라.

이와 가치 댱긔에서 전부를 재판할 수도 잇고 또는 분리도 할 수 잇는 것인대 총독부에 폭발탄을 던진 사건은 다만 피고를 조사하얏슬 뿐이오 자세한 사정을 알지 못함으로 사정을 자세히 아는 경성에서 심리하는 편이 편리하리라 생각하야 그와 가치 청구한 것이라. 그러나 재판관이 엇더케 결뎡할는지 분리하고 아니하는 것은 재판관의 의사에 달녓지마는 만일 분리를 한다 하면 이곳에서 선고를 바든 후에 경성에서 또 판결을 밧게 되야 피고의게 불리하리라는 말도 잇스나 이러한 경우에는 법관이 사정을 참작하게 되야 반드시 불리하다고만 단정할 것도 아니라 하더라.

현대문
공개된 폭탄사건의 진상
조금도 감추지 않고 명쾌하게 진술
김익상 제1회 공판 상보
나가사키에서 특파원 유광렬 전보
지난해 9월 12일 대낮에 총독부에 폭탄을 던져 세상을 놀라게 하고 올해 3월 28일에 상하이 부두에서 다나카 대장을 저격한 김익상의 공판은 30일에 나가사키에서 열렸다는 소식을 어제 지면에 이미 보도했다. 본사에서는 이 사건을 특히 자세히 전하기 위하여 그곳까지 사원을 특파하였고 이제 그 공판의 자세한 전보가 왔기에 여기에 보도한다.

대낮에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져 한때 세상의 이목을 놀라게 하고 상하이 부두에서 일본 군벌의 거두 다나카 대장을 또 저격한 김익상의 공판은 예정과 같이 30일 오전 9시 40분에 나가사키지방재판소에서 마츠다 재판장과 오카다 이시바시 두 배석판사와 이시카와 검사가 자리에 앉은 뒤 개정되었다. 김익상은 푸른 미결수 옷을 입고 벙글벙글 웃는 낯으로 의기가 충천한 듯한 태도로 앉아서 자주 방청석과 신문기자석을 돌아보면 은근히 눈인사를 한다. 마츠다 재판장은 먼저 피고의 주소와 성명 출생지 전과 유무를 물은 뒤 입회한 이시카와 검사가 예심결정에 기재된 사건에 대하여 재판을 청구한다 하고 앉자 재판장은 다시 심리를 계속하여 피고의 신분과 학력은 어떠한가 물으니

총독부 폭탄투척의 동기
본래의 소원은 비행학교
의열단 수령의 말에 흥분
나의 모친은 내가 13세 때 죽고 나의 부친은 내가 21세 때 죽었으며 교육은 별로 받지 않았소. 그 이유는 글을 읽으면 머리가 아파서 공부를 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슬쩍 웃음을 머금고 다시 부친은 일본사람과 같이 재목상사를 경영한 일이 있었는데 일본인에게 속아서 재산을 탕진하였고 그 다음에 나는 어렸을 때 평양에서 철공견습을 했고 광성연초공사의 기계감독으로 작년 6월에 펑톈에 가서 보니까 직업에는 별로 흥미가 없고 어렸을 때부터 소원인 비행기학교에 입학하기 위하여

그때 같이 일을 하던 송병휘와 함께 엽연초를 횡령하여 상하이로 갔다가 다시 상하이에서 천진으로 갔다가 다시 그곳에서 광둥으로 갔소. 그러나 그때 마침 중국의 남북전쟁이 한창이어서 비행기학교는 폐교되었으므로 할 수 없이 상하이를 거쳐 베이징으로 가서 조선독립운동을 목적으로 삼아 베이징에 있는 의열단 수령 김약산을 만나게 되었소. 그는 말하되 『조선의 독립은 이천만 민족의 십분의 팔 이상이 피를 흘리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이때에 선두에 나아가 희생하는 것이 마땅하다』라는 말을 듣고 나는 크게 감격하여 그해 9월 9일에 김약산에게서 폭발탄 2개와 단총 2개를 받아가지고 즉시 암살에 착수하였소.

일본 노동자 복장으로
총독부에 폭탄 던졌던 사실 전말
당시에 경계가 엄중해서 나는 일본인으로 변장하고 목닫이 양복 안에 폭탄과 단총을 감춰가지고 9월 10일에 베이징을 떠나 11일에 경성에 도착해 하룻밤은 동생 집에서 쉬고 12일 오전 중에 일본 노동자 차림을 하고 작업화를 신고 폭탄을 바지 속에 감추고 총독부로 갔었소. 그러나 정문은 경계가 엄해 뒷문으로 들어가서 2층으로 올라가 먼저 비서과에 폭탄을 던지고 두 번째 회계과에 던졌는데 폭탄은 한 번에 폭발하였고 나는 그 광경을 보며 즉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더니 헌병 여러 명이 오기에 나는 『2층으로 올라가면 위험하다』는 말을 하고 즉시 달아났소.

폭탄투척 이유
일본인을 깨우치고자
폭탄은 블라디보스톡에서 제조
재판장은 다시 『폭탄은 어디서 났느냐. 김약산이가 만든 것이냐』 물으니 『김약산의 말을 들으면 블라디보스톡에서 수입한 것이라는데 내가 본 것만 해도 200여 개가 있었소』라고 대답하고 그 다음에는 폭탄제조에 대한 피고의 설명이 있고 총독부에 갔을 때 공범이 있었느냐 묻자 『공범자는 없지만 기차 안에서 일본 여자와 이런 말 저런 말을 해서 교묘히 부부가 동행하는 것처럼 해서 경찰의 검사를 피하였고 남대문에 내려서는 폭탄을 몸에 지녔음으로 자유롭게 걸을 수도 없고 펑톈에서 온 조선사람은 모두 검사를 하므로 나는 동행하던 일본 여자의 세 살 가량 된 아이가 매우 귀여워서 혼잡한 중에도 아이를 안아 주겠다고 그 아이를 안고 정거장 구내까지 오랫동안 거닐다가 경관의 검사를 면했소.
폭탄을 던진 후에 보통 여관으로 갔다가는 경관의 수사가 심할 터여서 일본 요리집으로 들어가서 대장장이 옷을 한 벌 사 입고 기차를 타고 신의주로 가서 경관이 취조하기에 나는 일본사람인대 오사카 미나미구 야마토초에 사는 미카카미라고 멋대로 주워대 경관을 속이고 겨우 피하였소』 총독부에 폭탄을 던진 이유는 무엇이냐 하니 『처음에는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져 일본인을 크게 반성하게 하고 각성하게 하려고 생각하고 9월 17일에 베이징에 도착해 김약산을 만나 전후 사실을 말했소.』

상하이 사건의 전말
탄알은 빗맞고 폭탄은 안 터져
도망 중에 총알 맞고 잡혀
그 후에 다나카 대장을 저격한 경과에 대해 진술하였는데 『총독부에 폭탄을 던진 후에 큰 영향이 없음을 보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일본 고위관리와 조선 고위관리를 암살하려고 생각하고 올해 2월 20일에 베이징을 떠나 상하이로 가서 김약산과 장래에 대해 의논을 하는 중에 동지 오성륜을 만났소. 그때 마침 다나카 대장이 필리핀에서 상하이로 온다는 보도가 있기에 크게 기뻐하여 신문에 난 사진을 보고 다나카의 상륙함을 기다리고 있는 중에 『3월 28일』 오후 3시 30분에 상륙한다 하므로 나는 양복에 단총 한 개와 폭탄 한 개를 감춰가지고 오성륜은 단총 한 개를 가지고 부두로 나갔소. 오성륜이가 먼저 단총을 쏘았으나 총알이 다나카에게 맞지 않고 그 곁에 있던 영국 부인에게 맞았으며 나는 폭탄을 던졌으나 화약이 나빠서 터지지 않앗고 그 곁에 있던 순사가 그것을 주워서 물에 던졌소.

나는 일이 실패된 것을 보고 그 자리를 피하려 할 때에 중국 순경이 달려들므로 쫓아오는 순경을 위협하기 위하여 공중을 향하고 총을 한 방 놓았더니 맞지도 않았는데 놀라서 순경이 쓰러지는 것을 보고 다시 지우장루를 지나 시촨루로 달아나는 중에 『톰손』이라는 영국인이 나에게 육혈포를 쏘아 내 손과 발에 맞았으므로 어찌할 수 없이 손발을 버둥거리는 중에 다시 총알은 왼쪽 가슴에 맞아 넘어져서 여러 영국 순사와 중국 순경이 쫓아와서 체포되었소』라고 진술했다. 재판장은 다시 중국 순경에게 총을 쏠 때에 그를 죽일 목적으로 쏜 것이 아니냐고 묻자 피고는 냉소를 지으며 『우리에게 아무 관계도 없는 중국인을 죽일 필요는 없고 오직 위협을 하기 위하여 쏜 것이오. 만약 다나카에게 쏘았다 하면 그야 물론이오. 하늘을 향해서 쏜 것은 사실이오』라고 그때 총 쏜 흉내를 내면서 또 웃는다. 이때 방청석에서도 웃음소리가 일어났다. 재판장은 다시 오성륜의 총알이 다나카 대장에게 맞았다면 피고는 폭탄을 던지지 않을 생각이었느냐고 묻자 『아니오. 오성륜의 총알이 맞았더라도 나는 나의 폭탄을 다나카에게 던지려고 생각하였소.』

만원의 방청석
조선 기자는 한 명뿐
방청석에는 수 명의 경관이 경계하며 나가사키현 순사교습소의 교습생 60여 명도 방청하고 있었으며 보통 방청석에는 조선인과 일본 청년이 입추의 여지도 없이 들어앉고 문밖에도 들어오지 못한 사람이 수십 명이며 신문기자석에는 도쿄 오사카의 각 큰 신문 통신원과 나가사키 유수한 신문기자가 죽 앉아서 바쁘게 펜을 움직이는데 조선에서 온 기자는 오직 한 사람뿐이다.

검사의 분리청구
총독부 사건은 경성에서
따로 심리해 달라는 요청
다나카 대장을 저격한 폭탄의 위력은 과연 어떠한가. 그 폭탄을 중국 순경이 주워서 바닷물에 던졌을 때 폭발했으면 어떠하였을까. 그 폭탄은 던진 후에 1분 이상 지나서 터지지 않으면 폭발하지 않는 것이므로 물에 던졌을 때에는 아무 관계도 없었다. 다나카 대장에게 던진 폭탄의 출처는 어디인가. 역시 블라디보스톡에서 수입한 것으로 김약산에게서 얻은 것이다. 다나카를 죽이려 한 의도는 무엇인가.
다나카뿐 아니라 일본 고위관리는 모두 죽이려 한 것이라고 심리를 진행하는 중에 이시카와 검사로부터 피고의 범죄 중 제2의 사실 즉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진 사실은 조선총독부에 부속되는 경성지방법원에서 심리하여 달라는 청구가 나온 뒤 재판장은 잠깐 휴게를 하겠다고 선언하고 법관 일동은 합의를 하기 위해 자리를 떴는데 이때 다나베 변호사로부터 검사의 청구를 설명해 주면 피고는 어디든지 가겠다고 매우 배포가 든든한 태도로 말했다. 법관 일동은 잠시 합의한 뒤 11시 50분에 다시 자리에 앉아 재판장은 검사의 청구는 다음에 결정하겠다고 선언했다.

피고의 이익은
『조선의 독립』
오전 중 심리 종료
다시 심리를 계속해 펑톈에서 입담배 횡령한 사건의 취조와 총독부에 폭탄을 던진 사건에 대한 경찰의 보고서와 피고의 총탄에 상한 영국인 『톰슨』의 조서, 폭탄을 던졌던 때의 모습과 기타 증거 조사기록을 읽고 피고의 동의를 얻은 뒤 무엇이든지 피고에게 유리한 증거가 없느냐 하자 피고는 또 벙글벙글 웃으면서 『나에게 이익되는 점은 조선독립이오』라고 말해 재판장을 놀라게 했다. 정오에 재판관 일동은 잠깐 휴게를 선언한 뒤 자리를 떴다.

심리는 대체로 종료
쾌활한 김익상
김익상은 몸에 푸른 미결수 옷을 입고 머리를 5부로 깎고 얼굴은 약간 야윈 듯하나 피곤한 빛이 없이 생기가 펄펄한 눈으로 재판장의 심문에 일사천리의 모습으로 진술을 했다. 오전 중에 대체로 심리는 마친 모양이다. (30일 오후 0시반 나가사키 발)

다음 공판은 미정
중국 순경 등을
증인으로 취조
오후 4시 20분에 계속 개정해 마츠다 재판장으로부터 증인으로 상하이의 중국 순경과 당시에 총을 맞은 영국 부인의 남편 『톰슨』을 조사하기 위해 상하이영사관에 위탁하고 조선총독부에 던진 폭탄을 분해해 감정해달라고 조선총독부에 부탁하겠다고 말하고 다음번 공판은 날짜를 정하지 않고 즉시 폐정했다. 이로써 사실심리의 대강을 마치고 다음 공판은 상하이에 알아보는 기간 관계도 있으므로 약 1개월 후나 될 듯하며 또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진 사건만을 경성지방법원에서 분리해 심리한다는 문제도 다음에 결정할 것이라고 하며 사실을 심리할 때에 김익상이가 (톰슨)을 쏜 것은 본의가 아니라 자기가 일이 낭패된 것을 보고 자살하려고 총을 쏜 것이 잘못되어 『톰슨』에게 맞은 것이라고 진술한 것에 대하여 검사로부터 자세한 사실은 심문해 달라고 하였으나 이에 대해서는 아무 심문도 없었다.
(30일 오후 6시 나가사키 발)
김익상이가 체포 당시 영국인 『톰슨』에게 총을 쏘았던 사실이 이전 전보에 전문이 분명하지 못했으므로 독자의 짐작을 바람

화제가 된 그 대담성
신문의 대서특필
공판정에서 본 김익상의 대담한 태도에 대해 나가사키의 각 신문은 아주 큰 글자로 긴 제목을 달아서 이 사건을 자세히 보도하기에 한 개 면을 거의 다 할애했으나 나가사키 시내의 여기저기에서는 일본인 사이에서도 큰 이야기거리가 되었다고 한다.

분리를 청구한 이유
사실조사가 자세하지 않은 때문이라고
분리를 청구한 담임검사의 의견
김익상이가 경성의 총독부에 폭탄을 던진 사건은 경성에서 다시 재판하도록 따로 분리해 달라고 검사가 청구한데 대해 그 청구를 한 담임검사 이시카와 씨는 말하되 본래 김익상의 범행은 펑톈 경성 상하이의 3곳에서 저지른 것으로 바로 상하이영사관에서는 규정에 의해 나가사키지방재판소로 보낸 것이오. 그런데 이처럼 범행이 여러 곳의 재판소 관할이 되는 때에는 형사소송법 제27조에 의해 그 사건을 최초 공판에 착수한 재판소에서 관할하게 되어 있으므로 나가사키에서 전체 재판을 못할 것도 아니지만 1918년 4월에 발포된 공통법 제17조를 보면 이렇게 사건을 분리해 총독부 폭탄사건은 그 관할 재판소인 경성지방법원에 보낼 수도 있게 되었으므로 이에 의해 분리를 청구한 것이오.

이처럼 나가사키에서 전부 재판할 수도 있고 또는 분리도 할 수 있는 것인데 총독부에 폭탄을 던진 사건은 다만 피고를 조사했을 뿐이지 자세한 사정을 알지 못하므로 사정을 자세히 아는 경성에서 심리하는 편이 편리할 것으로 생각해 그렇게 청구한 것이오. 그러나 재판관이 어떻게 결정할는지, 분리하고 안 하는 것은 재판관의 판단에 달렸지만 만일 분리를 한다고 하면 이곳에서 선고를 받은 뒤에 경성에서 또 판결을 받게 되어 피고에게 불리할 것이라는 말도 있으나 이러한 경우에는 법관이 사정을 참작하게 되어 반드시 불리하다고만 단정할 것도 아니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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