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시작도 몰라…죽을 각오로 교전” 6·25 70주년 맞은 노병의 이야기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5월 22일 17시 3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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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섭 예비역 해군대령이 자신이 함장을 한 여러 군함 사진들 가운데 대한해협해전 때 적함을 격침시킨 백두산함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다.
최영섭 예비역 해군대령이 자신이 함장을 한 여러 군함 사진들 가운데 대한해협해전 때 적함을 격침시킨 백두산함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다.
“첫 해전 이긴 뒤 ‘적함은요?’ 전사자 한마디 평생 가슴에 새겨”

1950년 6월 26일 새벽, 부산 앞바다에서 아군 백두산함(PC-701)이 부산으로 침투하던 적함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대한해협해전’이다. 이 전투에 참전한 최영섭 예비역 해군 대령(92)이 겪은 상황과 소회를 1인칭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조타사 김창학 삼등병조(현재의 하사), 장전수 전병익 이등병조(현재의 중사). 70년 세월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들의 이름과 얼굴을 잊지 못한다. 백두산함 조타실에서 키를 잡았던 김창학은 복부에 파편을 맞았고, 주포 갑판에 있던 전병익은 가슴에 파편을 맞았다. 1950년 6월 26일 이른 새벽. 6·25전쟁은 막 시작됐지만 그들의 전쟁은 그때 끝났다.

적함과의 교전 막바지 중상을 입은 김창학과 전병익은 응급수술을 받기 위해 사병식당으로 옮겨졌다. 김창학의 윗옷을 벗기니 복부 여러 곳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업혀 들어온 전병익은 왼쪽 가슴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고 회백색 폐부가 보일 정도로 부상이 심했다. 피를 많이 흘린 이들은 연신 물을 찾았다. 주계장 조경규가 물컵을 입에 가져다줬으나 힘이 없어 마시지 못했다. 솜에 물을 적셔 입에 떨어뜨렸다.

내가 다가가자 두 사람은 숨을 헐떡이면서도 “적함은요”라고 물었다. 나는 “격침했다. 살아야 해. 정신 차려”라고 외쳤다. 이 말에 이들의 눈빛이 환해졌다. 두 사람은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가느다란 목소리로 “대한민국…”이라고 하면서 숨을 거뒀다. 지켜보던 병사들이 울음을 터뜨렸다.
● 전쟁 시작도 몰랐던 6월 25일 아침
1950년 6월 25일 아침은 평온했다. 우리 해군의 첫 전투함인 백두산함은 전날 밤 늦게 진해에 입항했다. “미국에서 사온 배를 한번 보여 달라”는 요청이 많아 동해, 서해, 남해의 여러 기지를 돌고 복귀한 것이다. 마침 다음 날이 일요일이라 총각이자 갑판사관(당시 소위) 겸 항해사였던 내가 당직을 자원했다. 영외 거주자들은 집으로 갔다.

오전 당직하사관과 함께 부두에서 빨래를 하고 군함 청소를 마쳤을 때였다. 통제부사령장관이 “작전 명령이 떨어졌다. 장병들을 급히 소집하라”고 지시했다. 정오 무렵 승조원 전원이 집결했다. 최용남 함장은 “적군이 오늘 새벽 동해안 옥계 해안으로 쳐들어왔다. 동해로 출동한다”고 밝혔다. 그때까지도 전쟁이 시작된 줄 전혀 몰랐다. 흔히 있는 소규모 침투 정도로 생각했다.

오후 3시 백두산함은 소해정 YMS-512정을 데리고 진해를 출항했다. 부산에서 오륙도를 바라보면서 북쪽으로 올라갔다. 오후 8시 10분, 울산 부근 해상을 지날 때 우현 견시병(見視兵)이 외쳤다. “우현 45도 수평선에 검은 연기 보임.”

쌍안경으로 보니 검은 연기가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해는 이미 넘어갔지만 하지(夏至) 때라 잘 보였다. 마침 함께 가던 소해정의 속도가 느려 백두산함이 가다 서다를 반복하던 차였다. 소해정을 먼저 보내고 잠시 항로를 벗어나 검은 연기의 정체를 확인하고 뒤따라가도 늦지 않을 듯싶었다.

15노트 속도로 빠르게 검은 연기 쪽으로 달려갔다. 1시간 반쯤 항해하니 선체를 새까맣게 칠한 괴선박이 눈에 들어왔다. 배이름이 없었고 국기도 달려 있지 않았다. 국적, 출항지, 목적지를 묻는 발광신호를 보냈으나 괴선박은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오후 10시 30분경, ‘정지하지 않으면 발포하겠다’는 발광신호를 보내며 접근했다. 그러자 괴선박은 이리저리 움직이며 속력을 높였다. 거리는 300야드(약 270m)까지 좁혀졌다. 갑판 위에 무장 병력이 가득했다. 코 모양을 보니 동양인이었고 600명은 넘어 보였다. 앞쪽에 큰 대포가, 뒤에는 기관포들이 달려 있었다. ‘아, 인민군이구나….’ 급하게 속력을 높여 3000야드(약 2700m) 거리로 물러났다.
● 죽을 각오로 근접해 교전
해군사관학교에 있는 백두산함 마스트(등록문화재 제463호).
해군사관학교에 있는 백두산함 마스트(등록문화재 제463호).
함장은 장교 7명을 모아 냉수로 건배를 제안했다. “괴선박은 인민군 군함이 틀림없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자.” 살아서 마시는 마지막 물이 될 수도 있었지만, 마음은 오히려 편안했다.

해군본부에 공격 허가를 요청했다. 밤 12시가 지나 공격 명령이 떨어졌다. 26일 0시 30분경, 3인치 함포에서 첫발이 발사됐다. 그간 모의탄으로만 훈련하던 백두산함이 실탄 사격을 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적함은 기다렸다는 듯 함포와 기관포로 응사했다.

적함의 화력이 더 우세했다. 백두산함의 포탄은 100발이 전부였다. 20~30발을 쐈으나 파도에 배가 흔들리면서 거의 맞지 않았다. 여기서 포탄을 다 쓰면 동해안에 상륙한 적군을 격퇴하라는 명령을 따를 수 없게 된다. 함장이 잠시 고민에 빠졌다.

“적함에 접근해 공격한다.”

가까이 가면 우리도 맞을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니 죽을 각오를 한 결심이었다. 최고 속력(18노트)으로 돌진해 500야드(약 450m) 거리에서 포탄을 쐈다. 적함 함교에 적중하는 모습이 보였다. 마스트(돛대)가 꺾였고 기관실에도 여러 발이 명중했다. 오전 1시 10분경 연기에 휩싸인 적함이 왼쪽으로 기울어져 서서히 침몰하기 시작했다. 가라앉는 적함의 흘수선(배와 수면이 접하는 선)을 계속 때렸다.

승리감도 잠시, 침몰하던 적함에서 포탄을 쏴댔다. 김창학과 전병익이 파편을 맞은 것이 이때다. 강원 평강 출신으로 스무 살이 되던 1947년 가족들과 함께 월남해 해군 장교(해사 3기)가 된 나는 평소 병사들에게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고 죽자”고 말해 왔다. 하지만 실제로 그 모습을 본 순간 울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에게 마음의 빚을 졌다.

백두산함이 수평선 끝에 걸쳐 있던 ‘검은 연기’를 확인하지 않고 동해로 갔다면 부산은 위태로웠을지 모른다. 당시 부산에는 우리 군부대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600여 명이 상륙하면 그대로 점령됐을 수도 있었다. 부산항을 지켜낸 덕에 미군과 유엔군의 병참물자가 들어올 수 있었다.
● “그들을 특별히 기억했으면…”
7년만 지나면 내 나이 100세다. 60대부터 ‘버킷리스트’를 생각해 왔다. 전사자의 유가족을 찾아내 훈장 받게 하기, 전사자 흉상 세우기 등. 1988년 부산 중앙공원에 대한해협해전 전승비를 건립할 때 비문의 큰 글씨를 내가 썼다. 전승비의 비(碑) 자의 윗점 획을 일부러 쓰지 않았다. 해군작전사령부에 ‘통일이 된 다음에 점을 찍어라’라고 이야기했다.

버킷리스트에 있던 일들을 대부분 이뤘지만 그래도 요즘 내 심정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일모도원(日暮途遠·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다)이다. 그동안 모아둔 30, 40년 치 일기장을 꺼내 하나하나 정리하며 회고록을 쓰고 있다.

2013년에 대한해협해전을 다룬 책 ‘6·25 바다의 전우들’을 쓴 이유는 ‘전우들이 대한민국을 어떻게 지키다 죽었는지’를 기록하는 게 내 책임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전과 뒤의 희생이 간과돼서는 안 된다. 이스라엘 홀로코스트 기념관에 ‘망각은 파멸을 초래하고 기억은 구원의 비결’이라는 문구가 있다. 대한해협해전에서 전사한 김창학과 전병익을 특별히 기억해주면 좋겠다.

다음 달 26일 부산에서 대한해협해전 기념행사가 열린다. 반드시 참석할 것이다. 오래 걷지를 못하니까 휠체어만 탈 수 있다면 가려고 한다.

성동기 기자 esprit@donga.com
▼▼▼해군 최초 전투함 ‘백두산함’: 국가 재정 모자라서…장병-부인회서 돈 모아 마련▼▼▼

대한해협해전에서 적함을 격침시킨 ‘백두산함’(PC-701)은 우리 해군 최초의 전투함이었다. 정부 수립 이후 빈약한 국가 재정 때문에 함포가 장착된 군함을 구입할 수 없자 해군은 자체적으로 군함 구입 자금을 모금했다.

대한해협해전 당시 백두산함 갑판사관이었고 이후 백두산함 함장을 지낸 최영섭 예비역 해군 대령(92)에 따르면 장병들이 월급에서 5~10%를 갹출하고, 부인회에서 삯바느질과 바자회 등으로 돈을 마련해 852만 원을 모았다. 이승만 대통령에게 이 돈을 전달하며 군함 구입을 청원하자 이 대통령이 4만5000달러를 보태 구입을 추진했다.

백두산함은 미 해군이 제2차 세계대전 때 건조한 군함으로 1946년 퇴역해 무장을 해제한 뒤 뉴욕의 해양대 실습선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해군은 1949년 10월 백두산함을 1만8000달러에 사들였다. 백두산함은 하와이에서 3인치 함포를 장착하고 괌에서 포탄 100발을 산 뒤 6·25전쟁 두 달 전인 1950년 4월 10일 경남 진해에 입항했다. 포탄을 100발만 산 것은 돈이 모자라서였다. 백두산함은 대한해협해전, 인천상륙작전, 서해도서 수복작전 등 6·25전쟁 내내 활약한 뒤 1959년 퇴역했다.

백두산함이 승전한 대한해협해전은 6·25전쟁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미 해군연구소는 2007년 ‘백두산함의 승전 이후 부산은 연합군의 최후 보루로 증원 병력과 물자의 주요 도입항이 됐다’고 평가했다.

아쉽게도 백두산함의 선체는 남아 있지 않다. 최 예비역 대령은 “해군본부에 근무할 때 ‘쇠가 없어서 백두산함을 용광로에 넣었다’는 얘기를 듣고 기겁했다”고 전했다. 그는 공창장에게 전화해 “마스트(돛대)는 미송이다. 그것도 불에 땠느냐”고 물었더니 “모르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다행히 마스트는 쓰레기장에 버려져 있었다. 마스트(등록문화재 제463호)는 현재 해군사관학교에 세워져 있다.
▶대한해협해전의 의미:

6·25전쟁 개전 초기 우리 해군이 승리한 대한해협해전은 우연하게 일어났다. 6월 25일 밤 수평선을 따라 흘렀던 ‘검은 연기’를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면 백두산함과 적함은 서로 마주치는 일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백두산함은 적이 상륙한 동해안 옥계로 출동하라는 명령을 받고 북쪽으로 이동 중이었고, 완전무장한 군인 600여 명을 태운 적함은 부산으로 은밀하게 침투 중이었다. 백두산함의 갑판사관 겸 항해사·포술사였던 최영섭 예비역 해군 대령(92)은 이를 인생의 원리에 비유했다. “90년을 살아보니까 계획을 하고 목표를 세우고 하는 것은 20~30%입니다. 70~80%는 우연하게 그 길이 정해집니다. 수평선의 검은 연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것이 목표가 아니었지만 그렇게 가게 됐습니다.”

대한해협해전 승전으로 부산은 안전해졌고, 북한은 패전 이후 해상작전을 바꿔야 했다. 지상군 작전과 연계해 무장 게릴라 병력을 해안에 상륙시킨다는 작전을 철회하고 서해안 도서지역 침투로 선회했다.(해군본부, ‘6·25전쟁과 한국해군작전’)

미국 군사연구자들은 대한해협해전을 높이 평가한다. 6·25전쟁 때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첩보임수를 수행했던 노만 존슨 박사는 1991년 출간한 책 ‘한국전쟁’에서 “북한군 특수요원 600~700명이 해로를 통해 부산을 점령하려고 투입됐다. 다행히 부산 인근 해상에서 이 위장선이 한국 해군에 의해 격침됐다. 이 사건이 6·25전쟁의 분수령이 됐다”고 적었다.

2007년 미 해군연구소가 발간한 ‘한국전쟁과 미 해군’에는 대한해협해전 승전의 의미가 보다 구체적으로 담겨 있다.

‘600여 명의 북한군이 탑승한 무장 수송선이 거의 무방비 생태였던 부산항을 향하고 있었다. 백두산함이 적함을 침몰시킨 이후 부산은 한반도에서 연합군의 최후 보루가 됐고 증원 병력과 물자의 주요 도입항이 됐다. 백두산함의 승리는 그만큼 중요했다.’

이 책은 또한 “백두산함의 적함 격침은 중요한 항구를 한순간에 잃어버리는 것을 막았고, 유엔군이 한국에서 생존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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