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형의 생각하는 미술관]<41>허름한 장소에 놓인 시대의 자부심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0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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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페르메이르, ‘우유를 따르는 여인’.
얀 페르메이르, ‘우유를 따르는 여인’.
 얀 페르메이르(1632∼1675)의 삶과 예술은 빈칸이 많습니다. 전해오는 공식 기록은 17세기 네덜란드 델프트에서 태어나 가정을 이루었고, 화가로 활동하다 타계했다는 정도입니다.

 화가는 미술가 길드에 가입하면서 예술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길드로부터 화가로서 전문성을 인정받고, 그림 판매를 허락받았지요. 이 무렵 네덜란드 미술 시장은 호황이었습니다. 구매력을 갖춘 시민들이 새로운 미술품 구매자로 출현했거든요. 날로 치열해지는 경쟁에 미술가들은 제작에 속도를 더했어요. 하지만 화가는 변함없이 더디게 작업했습니다.

 3층 집 꼭대기, 볕이 잘 드는 작업실에서 소소한 일상을 은은한 빛과 색, 정교한 공간과 구도로 표현하고자 예술적 탐구를 계속했습니다. 화가는 진중하게 당대가 옹호했던 성실하고 검소한 삶의 가치를 작은 캔버스에 채워 넣었어요. 이런 시대정신은 ‘우유를 따르는 여인’에도 서려 있습니다. 그림의 주인공은 빵과 우유가 전부인 소박한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우유 옮기는 일에 완전히 몰입한 여인의 태도 때문이겠지요. 고요한 아침, 허름한 주방에 북유럽의 찬 기운 대신 경건함과 평온함이 가득합니다. 사소한 일에 최선을 다하는 여인이 근면한 삶의 소중함을 일깨워 줍니다.

 그림에는 여러 종류의 도기들이 등장합니다. 여인의 손에는 당시 흔했던 투박한 갈색 주전자가 들려 있습니다. 좁은 식탁 위에는 흰빛과 푸른빛이 어우러진 보관 용기가 빵 바구니와 함께 있군요. 부엌 벽바닥을 따라 푸른 문양을 새긴 하얀 타일도 일렬로 늘어서 있습니다. 해외 무역이 활발했던 당시 흰색 바탕에 청색 안료로 무늬를 그려 넣은 아시아 도자기는 인기 품목이었습니다. 하지만 곁에 두기에 턱없이 귀하고 비쌌어요. 모든 일에 자신감 넘쳤던 당대인들은 도기 굽기에 도전하기로 했지요. 이탈리아에서 이주한 도공들의 도움을 받아 시작된 델프트 도자 산업은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림 속 도기들은 이런 진취적 시대정신이 구워낸 빛나는 성취였습니다.

 인간 존엄과 사회 안전을 위협하는 사건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전에 없이 그림 속 주방 벽면에 난 못 자국과 회반죽 균열이 눈길을 잡아끕니다. 그림 속 허술한 부엌 창문 곁 놋쇠 주전자와 바닥 먼지 사이에 놓인 도기들 같은, 우리 시대의 자부심 깃든 무언가는 어디 있을까요. 그림에서 시선을 돌려 주변 여기저기를 둘러 살피게 됩니다.

공주형 한신대 교수·미술평론가
#얀 페르메이르#우유를 따르는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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