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형의 생각하는 미술관]<42>잠재력의 싹에서 무한의 세계까지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0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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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지미르 말레비치, ‘검은 사각형’.
카지미르 말레비치, ‘검은 사각형’.
 카지미르 말레비치(1878∼1935)는 러시아 전위 미술가였습니다. 20세기 초 풍요로웠던 철학 사상과 미술 풍토를 자양분으로 자신만의 절제된 미술 세계를 완성했지요.

 화가는 정신과 감성이 최고 상태로 구현된 미술을 추구했습니다. 이런 예술 목표에 닿고자 인물과 정물, 풍경과 풍속을 캔버스 밖으로 추방했어요. 역사와 신화, 종교와 현실 속 이야기도 삭제했습니다. 바깥세상을 소박하게 변형하고, 성실하게 복사하려는 의지도 내려놓았지요. 미술 전통을 백지화했고, 물질과 이성을 부정했습니다.

 1915년 미술가는 자신의 예술 신념을 전시에 펼쳐 보였어요. 화가를 포함한 참여 미술가 10명은 극단적 순수를 지향했던 미술가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공동의 예술적 관심사를 전시 명칭, ‘미래주의 최후의 전시회 0-10’에 담았어요. 화가는 원색과 기하학적 형태로 구성된 그림을 선보였습니다. 당대 미술계의 당혹감은 검은색 사각형을 그리고 제목마저 ‘검은 사각형’인 출품작에서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화가는 기본적인 형태와 간략한 색채로 현실 너머에 관한 사유를 권하고자 했지요. 관객들이 하얀 바탕과 검은 사각형 사이의 깃든 긴장에 주목하길 바랐습니다. 검은색이 품은 다채로운 느낌과 표면 질감을 눈여겨보기를 염원했습니다. 불가사의한 세계를 폭넓게 상상하기를 소망했습니다.

 극도로 단순화된 형태는 변함없이 화가 예술을 견인했습니다. 반면 색채에는 변화가 잇따랐어요. 화가 예술 여정의 동반자는 검은색에서 다채로운 색채를 경유해 마침내 흰색으로 바뀌었지요. 하얀 바탕 위 하얀 사각형, 해방과 무한을 향한 화가의 분투는 흰색 세계에서 갈무리되었습니다.

 둘째 아이가 사춘기에 접어들었습니다. 눈에 띄는 변화는 얼굴의 여드름과 건조해진 말투만이 아닙니다. 검은 후드 티와 검은 스키니 진, 검은 스니커즈에 검은 백팩. 아이는 알록달록한 색채에서 벗어나 검은색 세계로 깊숙이 진입했습니다. 아이가 곁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서운함 때문에 아파트 창가를 쉽게 떠나지 못했습니다. 등교하는 아이의 뒷모습이 까만 점이 될 때까지 한참을 바라보았습니다. 화가가 ‘모든 잠재력의 싹’이라던 검은색을 떠올렸지요. ‘우울한 어둠을 찢고 탈출’해 비로소 얻었다던 흰색도 생각났습니다. 아이가 무엇을 백지화하고, 누구를 부정하여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나갈지 염려와 기대가 뒤섞인 아침이었습니다.

공주형 한신대 교수·미술평론가
#카지미르 말레비치#검은 사각형#미래주의 최후의 전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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