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주경철]환관 정화는 왜 대규모 해상 원정에 나섰을까

  • 동아일보

“유럽의 아시아 정복과 다르다”… 中, 평화적 중화질서 전파 주장
실제로는 실론정벌 국왕납치… 해양제국주의 성격도 분명
정치에 복무하는 관제 역사학…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우려한다

주경철 객원논설위원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주경철 객원논설위원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시대가 변하면 자연스럽게 역사 해석도 달라진다. 중국의 해양사(海洋史)를 새롭게 주목하는 이유다. 우리의 사고에는 일종의 관성이 작용하여 중국은 곧 대륙 문명이고 중국사는 대륙 제국의 역사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역사적으로 중국의 해상력은 우리가 통상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했다. 이를 예시하는 것이 정화(鄭和)의 남해원정이다.

명대 초인 1405년, 무슬림 가문 출신의 환관 정화는 황제의 명령을 받아 대규모 선단을 꾸려 일곱 차례에 걸쳐 인도양 세계를 탐사했다. 그는 길이 125m에 달하는 대형 범선 60여 척에 적어도 100척 이상의 소선에다가 2만∼3만 명의 인원을 통솔하여 인도양 지역 내 30여 개국을 방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대규모 해상 사업이었다.

명 제국이 이와 같은 초대형 원정 사업을 추진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실로 핵심적인 질문이지만 이런 중요한 문제에 대해 답할 수 있는 자료가 부족한 형편이다. 1433년 마지막 원정 이후 명의 국가 정책이 극적으로 바뀌어 바다로 나가는 것을 철저히 금지하는 해금(海禁) 정책을 폈다. 이후 중국 역사는 내향적으로 되었고, 제국의 무게중심이 북쪽 내륙 지방으로 옮겨갔다. 이 과정에서 남해원정 관련 문서들이 대부분 폐기되어 이 세계사적 사건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이 매우 힘들게 되었다.

공식적으로 언급하는 원정 목적은 쿠데타 과정에서 제거된 전 황제 건문제가 아직 해외에 살아 있다는 유언비어가 퍼져서 그의 행방을 찾는다는 것이었다. 그 외에 일반적으로 제시하는 사업 목적은 중국 황제의 위엄을 만방에 떨치고 해상교역을 장려하며 각지의 진기한 동식물을 수집하여 황제에게 헌상한다는 것 등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일들을 하기 위해 초국가적 대사업을 벌였다고 보기는 힘들다.

주목해 볼 점은 중국 역사학자들의 해석이다. 이들은 중국의 해외 팽창이 평화적이었다고 극구 주장한다. 사실 유럽인들이 아시아와 아프리카 혹은 아메리카에 들어갔을 때 지극히 폭력적인 행태를 보인 것은 분명하다. 이와 달리 정화의 사업은 살인·폭력·약탈 혹은 종교의 강제 전도 같은 일이 없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정화 선단은 약탈을 하지 않고 중국의 발전된 문물을 전해 주었을 뿐이며, 결과적으로 인도양 세계에 평화로운 질서를 부과했다고 서술한다.

이런 해석은 현재 중국의 세계 진출과 관련이 없지 않아 보인다. 우리는 베이징 올림픽 입장식에서 정화 항해를 상징적으로 재현하면서 중국 문명의 발전된 문물을 전달하는 것처럼 묘사했던 것을 기억한다. 과연 그럴까? 중국은 주변 각국에 도자기를 전해 주고 아프리카의 기린이나 타조 같은 동물을 가져오기 위해 그 엄청난 자원을 투입했단 말인가?

정화 원정의 실상은 그런 이미지와는 많이 다르다. 예컨대 3차 원정에서는 실론과 전투를 벌여 국왕과 조신들을 체포해서 중국으로 압송해 왔다. 2000명의 무장군인들이 왕궁을 공격해 들어가는 장면을 보면 정화가 평화의 사절이라고 순진하게 해석하기는 힘들다. 이 시대 중국의 해상 팽창이 ‘해양제국주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반대편 주장도 동시에 귀담아들으며 공정한 평가를 해야 마땅하다.

중국 역사학자들은 철저히 자국 중심의 해석만 제시한다. 중국 학자들의 주장이 천편일률적으로 다 같다고 단정할 수는 없겠으나, 우리가 접하는 다수 학자들의 글은 맘 편하게 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 심지어 동남아시아 지역 주민들이 황제의 덕을 흠모하여 중국에 도움을 청한 결과 정화 선단이 찾아가 평화를 이루었노라는, 그야말로 구시대적인 주장을 버젓이 펼친다. 비유하자면, 조선이 일본 조정에 도움을 요청하여 그 은덕으로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든지, 인도가 영국 국왕을 흠모하여 군사 파병을 요청한 것이었다고 주장하면 누가 수긍하겠는가.

역사 해석은 자칫 현실정치에 종속될 우려가 있다. 중국 정치 지도자들이 비단길과 정화 원정에 대해 부쩍 많이 언급하는 것이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세계 전략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역사학은 당연히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지만, 그것이 곧 정치가들을 위해 복무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관제(官製) 역사학의 맹점이 그것이다. 남 이야기만이 아니다. 밀실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우리 역사 교과서 또한 불안하기 짝이 없다.
 
주경철 객원논설위원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역사#중국#해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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