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70년, 한일 성찰의 기회” vs “역지사지로 상대 인정해야”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8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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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관계 미래 이렇게 열자’ 전문가 대담 <하>
강 상 중 도쿄대 명예교수… 염 재 호 고려대 총장

《 염재호 고려대 총장(60)과 강상중 도쿄대 명예교수(65)가 일본 도쿄(東京)에서 만났다. 일본에서 산업정책을 연구한 염 총장과 재일교포로 사상 첫 도쿄대 교수와 4년제 종합대(세이가쿠인대) 총장을 지낸 강 교수 모두 한일을 잘 아는 대표적인 지성으로 꼽힌다. 대담은 6월 20일 있었으며 수차례 이메일과 전화 인터뷰를 통해 내용을 보탰다. 》

두 사람이 수인사를 나눈 뒤 강 교수(이하 강)가 먼저 “제 아내는 일본인인데 얼마 전 호주와 유럽에 갔을 때 입국 심사 직원이 ‘사이 나쁜 한국과 일본인이 어째서 부부인가’라고 물어 깜짝 놀랐다. 한일 관계가 나쁜 것은 세계가 다 아는 것 같다”고 말해 좌중에 큰 웃음이 번졌다.

―전후 70년이 지났는데 한일 관계가 악화되고 있는 것은 유감입니다. 왜 이럴까요.

▽염 총장(이하 염)=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밑바탕에 깔려있는 인식 자체가 서로 다르니까요. 일본은 1945년 이전 역사는 먼 옛일이라고 생각해 잊어버리고 싶어 합니다. 21세기가 시작된 지 벌써 15년이나 지났는데 100년도 더 지난 일을 갖고 아직도 시끄럽게 하느냐는 것이 잠재의식인 것 같습니다. 이에 비해 한국은 식민 지배를 당한 기억이 단순히 약탈과 강점이라는 문제를 넘어서 우리가 문화를 전해준 나라가 우리를 침략해서 지배했다는 국가적 자존감이 깔려 있어서 쉽게 일제강점기를 잊지 못합니다. 한마디로 20세기 역사는 일본으로서는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새롭게 출발하고 싶은 ‘과거’이고 한국으로서는 상처가 아직도 남아 있는 ‘현재’이기 때문에 인식의 간격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일본은 세계에서 중심 국가가 되고 싶은 욕망이 매우 강하기 때문에 과거를 외면하고 싶은 경향이 갈수록 커진다고 봅니다.

▽강=확실히 일본인들 다수는 자신들이 전쟁의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였다고 생각합니다. 전쟁이 싫은 것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원폭 투하라는) 비참한 일을 당했기 때문이라는 마음입니다. 반면 총장께서 말씀하신 대로 한국인들의 자존감은 근대사에서 너무도 상처받았습니다. 그게 아직 치유되지 않았습니다. 근대화가 시작된 이후 최근까지 일본은 세계에 어깨를 나란히 하는 열강으로서 또 선진국으로서 아시아에서 압도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향유해 왔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국력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한국과 중국이 세계 경제에서도 큰 위치를 차지해 일본의 비교 우위는 계속 허물어지고 있습니다. 그 위기감이 특히 원전사고를 동반한 동일본 대지진 이후 ‘국가적 자존감’ 회복을 요구하면서 과거사를 부정하는 역사 수정주의나 군사력 강화의 동력이 되고 있다고 봅니다.

―일본인들의 반한 감정이 일본 자체 내 문제가 반영된 측면이 있다는 뜻인가요.

▽강=한국의 경제력은 상승해왔는데 일본은 오랜 침체를 거치며 위축이 많이 되었지요. 이명박 정권 때에는 일본 미디어들이 집중적으로 한국의 여러 기술 능력이 일본을 추월하지 않았나 하는 ‘한국 위협론’을 보도했습니다. 당시 일본은 장기 디플레이션, 동일본 대지진 등으로 자신감을 잃어 의기소침해 있던 시기였고요. 지금 일본인들은 한국이 경제적으로 강해졌다는 의식이 저류에 깔려 있습니다. 서울 교보문고만 가도 반일(反日) 책 코너는 없지만 일본 서점에 가면 혐한(嫌韓) 코너가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한국이 훨씬 냉정히 보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일본 도쿄에서 만나 대화를 나누고 있는 강상중 도쿄대 명예교수(오른쪽)와 염재호 고려대 총장.
일본 도쿄에서 만나 대화를 나누고 있는 강상중 도쿄대 명예교수(오른쪽)와 염재호 고려대 총장.
―한일 두 나라에 광복 70년, 전후 70년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염=한국에 광복 70년은 21세기 선진국을 향해 새로운 출발을 하는 획기적 전환이 가능한 상징적인 해입니다. 20세기는 근대화에 늦은 구한말의 한국을 일본이 식민지화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에게 20세기 전반이 치욕과 고난의 역사였다면 후반은 이를 극복하기 위한 권토중래의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70년 동안 우리는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한 준비 작업을 마친 셈입니다. 기초체력을 갖췄으니 본경기에 임하는 새로운 출발 앞에 선 거지요. 요즘 우리 사회에는 한국은 결코 선진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극단적 비관론과 지금까지 잘 해왔으니 잘되겠지 하는 막연한 낙관론이 만연한데 모두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일부 혼란스러운 부분은 있지만 21세기 새로운 게임의 법칙을 숙지하고 최선을 다해 본선에 진출하는 다짐이 필요한 상징적인 해가 바로 올해라고 봅니다.

▽강=
일본에 올해는 다른 사람의 눈으로 자신들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식민지 지배와 침략 전쟁의 최대 피해자였던 한반도와 중국 등에서 자신들의 역사를 돌아볼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향후 바람직한 한일관계 발전을 위해 무엇이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염=역지사지의 정신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 한일 두 나라가 대립보다는 협력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갈등을 증폭시켜 정치적으로나 이념적으로 이용하여 이익을 얻으려고 하는 집단이 있다면 경계해야 합니다. 오히려 한국과 일본은 미래 인류의 공영과 보편적 가치를 위해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도 국가 동원이 있었느냐 하는 공방이 핵심이 아니라 여성을 도구화한 잘못을 반성하고 인권에 대한 가치를 공고히 한다는 철학과 정책을 양국이 협력하여 제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유럽연합이 각국의 이익을 넘어 새로운 국가연합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는 힘겨운 일련의 과정은 한중일 삼국의 미래에 좋은 교훈이 될 것 같습니다.

▽강=동아시아는 전후 특히 냉전기 환태평양을 노린 미국을 허브에 두고 일본이나 한국, 대만이 북한과 대치하는 국제 관계가 계속 이어져 왔습니다. 냉전 붕괴 후 중요한 일은 양자주의의 동맹이 아니라 보다 다양한 다자 관계를 쌓아 나감으로써 평화와 번영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입니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동북아시아 지역은 다자 관계의 대화와 신뢰 구축의 틀이 부재합니다. 그것이 지역을 불안정하게 하고 위기 상황으로 몰아넣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북한의 비핵화를 추진해 나가는 6자회담과 같은 다자의 틀을 발전시키고 그것을 상설적인 다자간 포럼까지 끌어올려 역사 문제와 안보 경제 협력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염=과거사를 직시하지 못하는 일본도 문제이지만 일본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데 거부감을 느끼는 한국도 달라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인과 일본인은 닮은 듯하면서도 다릅니다. 일본인들이 디테일에 강하다면 한국인들은 도전 정신이 강합니다. 서로의 약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살리면 협력할 여지가 많습니다.

▽강=말씀대로 한국은 ‘저팬 게이트’를 넘지 못하면 세계의 한국이 될 수 없고 일본은 ‘코리아 게이트’를 넘지 못하면 아시아의 일본이 될 수 없습니다. 서로에 대한 감정의 벽을 넘어서 협력해야 미래가 있습니다. 저는 특히 통일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통일 독일의 인구가 8000만 명입니다. 한국도 남북을 합치면 7000만 명이 넘습니다. 통일 한국을 유럽에 갖다 놓으면 독일과 맞먹는 큰 나라입니다. 삼팔선으로 끊어진 한국이 통일돼 자신감이 강해지면 일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

▽염=현대일본학회 회장도 하고 한일미래포럼 일도 했는데 그때 항상 강조한 것은 역사, 정치, 경제 문제와는 별도로 앞으로 20년 동안 한국과 일본, 중국이 하나의 생활공동체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고려대 인근 지하철역에도 영어, 중국어, 일본어로 역 이름이 써 있습니다. 삿포로에도 전부 한글이 써 있습니다. 언어가 이렇게 교류하니 세 나라가 동북아시아에서 생활 커뮤니티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즘엔 한일 간의 차이보다 부모 자식 간의 차이가 더 크지 않나 생각합니다(웃음). 지금도 가장 친한 일본 친구가 수산청, 외무성을 거쳐 히타치 임원으로 일하고 있는 사람인데, 그 친구도 나도 같이 비틀스를 들었던 세대여서 그런지 다른 나라 사람이라는 의식이 별로 없습니다. 젊은 세대들도 서로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데다 교류도 활발하니 역사 정치 문제가 해결되면 앞으로 10년, 20년 한일 관계는 매우 깊어질 수 있다고 봅니다. 저는 미래를 낙관합니다.
:: 약력 ::

강상중

재일 한국인 2세로 태어나 독일 에를랑겐대에서 정치학과 정치사상사를 전공하고 한국 국적으로는 처음 1998년 도쿄대 정교수가 됐고 2010년에는 도쿄대 현대한국연구센터 초대 센터장을 맡았다. 국내에 많은 독자를 갖고 있는 베스트셀러 저자이기도 하다.

염재호

고려대 행정학과 학·석사. 미국 스탠퍼드대 정치학 박사.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 기획실장·기획예산처장을 거쳐 올 3월 19대 총장에 취임했다. 외교통상부 산하 민간단체인 (사)한일미래포럼 대표를 지냈으며 한국정책학회 회장, 현대일본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진행=배극인 특파원 bae2150@donga.com

정리=장원재 도쿄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한일 관계#강상중#염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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