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손택균]人事파행 국립현대미술관의 ‘졸속’

  • 동아일보

손택균·문화부
손택균·문화부
“이번 전시는 맛보기입니다. 내년 대규모 기획전을 기대해 주세요.”

27일 열린 국립현대미술관의 ‘광복 70년 기념전’ 기자간담회에서 기획담당자는 끝인사를 그렇게 맺었다. 잠깐 귀를 의심했다. 나라를 대표하는 유일한 국립 미술관이 광복 70년 기념전을 내년 전시의 전초전으로 준비했다는 건가.

뒤이어 공개된 전시실 현장의 모습은 참담했다. 급조된 기색이 뚜렷한 전시 표제 ‘소란스러운, 뜨거운, 넘치는’만큼 허허롭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저마다 만만찮은 가치를 품은 작품 270여 점이 생기를 잃은 채 맥락 없이 흩뿌려져 있었다.

백남준의 비디오 작품, 정주하의 해수욕장 사진, 김기승의 도산 안창호 글 서예 작품, 김아타의 비무장지대(DMZ) 사진이 한 벽면에 빽빽이 걸렸다. “도산이 강조했던 ‘주인정신’을 잊은 요즘 세태를 엿볼 수 있다”는 알 수 없는 설명이 이어졌다. 민망했다. 자신의 작품을 이렇게 마구잡이로 늘어놓은 모습을 작가들이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기획자는 “미술 전문가가 아닌 대중의 눈높이로 마련한 전시”라고 거듭 강조했다.

전시가 결정된 건 5개월 전이다. 연초에 발표한 미술관 사업계획안에서 광복 70년 관련 내용은 덕수궁관의 근대미술 소장품전뿐이었다. 얼렁뚱땅 빼먹고 넘어가려던 숙제를 급하게 해치우듯 진행한 흔적이 전시실 구석구석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작품 설치에 들인 시간은 단 한 주였다. 동선(動線)에 대한 고려 없이 늘어놓은 작품들 사이로 비닐 막, 철망, 재활용 목재로 엮은 칸막이가 세워졌다. 작품명, 제작 연도, 작가 이름을 알려주는 명패도 없이 일련번호만 붙여 놨다. 안내지 3장을 들고 다니며 번호를 더듬어 일일이 찾아봐야 한다. 대형 전시임에도 신작이 없고 최초 공개작은 두 점뿐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정형민 전 관장이 지난해 10월 직원 부당 채용 혐의로 직위 해제된 뒤 10개월째 관장 공석 상태다. 연초부터 진행한 새 관장 선임 절차가 지난달 무산되면서 최종 후보와 인사권자인 문화체육관광부는 원색적 비난전을 벌였다. 4월에는 전시 실무를 총괄하는 학예연구실장이 갑작스럽게 바뀌었다. 광복 70년 기념전은 수장 없이 기획됐다. 운영책임자도 실무자도 없이 명목만 얼기설기 차린 전시에 세금 3억 원이 쓰였다. 인사 파행으로 인해 큰 그림 없이 굴러가는 조직이 어느 정도의 최악을 야기할 수 있는지, 이번 전시는 ‘넘치도록’ 보여준다.

손택균·문화부 sohn@donga.com
#국립현대미술관#졸속#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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