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읽기]<400> Edges of illusion (part VII)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4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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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학(1974∼ )

바다에 가라앉은 기타,
갈치 한 마리 현에 다가가
은빛 비늘을 벗겨내며 연주를 시작한다

소리 없는 꿈…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지만 부끄러워져
당분간 손톱을 많이 키우기로 마음먹는다
백 개의 손톱을 기르고 날카롭게 다듬어
아무 연장도 필요 없게 할 것이다
분산(奔散)된 필름들을 손끝으로 찍어 모아
겹겹의 기억들 사이에서
맹독성 도마뱀들이 헤엄쳐 나오도록 할 것이다
달의 발바닥이 보일 때까지
바다의 땅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나도 나의 사정거리 안에 있다

네가 고양이처럼 예쁜 얼굴을 하고 딸꾹질을 하고 있는 동안
나는 보라색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생선이 되어 너의 입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아무 미동도 없이,
고요하게

어른이 되고 싶었다

화자에게 삶은 음악의 형상으로 전해지고 그 연주가 삶의 형식이다. 화자 자신이기도 하고 화자가 생을 표현하는 도구, 가령 시이기도 한 기타. 그 기타 바다에 가라앉아 버렸단다. 아연실색 망연자실이련만 ‘현에 다가가’는 화자다. 한 마리 갈치가 되어서라도 기타를 버리지 않고 전신으로 ‘은빛 비늘을 벗겨내며 연주를 시작한’단다. 하지만 역시 ‘소리 없는 꿈’,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망가진 악기, 망가진 삶. 무엇이 화자를 이런 악몽에 처하게 했을까. ‘네가 고양이처럼 예쁜 얼굴을 하고 딸꾹질을 하고 있는 동안’, 이 구절의 ‘너’는 예쁘고 앙큼한 어떤 여인이거나 그 여인으로 의인화한 이 사회다. 딸꾹질하는 그녀는 만취한 걸까, 격렬하게 울고 있는 걸까. 어쩌면 그녀는 대화할 의사가 없음을 딸꾹질로 교묘히 숨기고, 혹은 드러내는 것인지 모른다. 아무튼 그녀가 딸꾹질을 해대는 ‘동안’ 화자는 ‘보라색을 뚝뚝 흘리고 있었’단다. ‘보라색’은 세상이든 자기 자신이든 가리지 않고 파헤치고, 가차 없이 채찍질하고 담금질하겠노라 맹세하는 둘째 연에 붙으면 피 같은 선율이 되고, ‘생선이 되어 너의 입속에 들어가고 싶었다/아무 미동도 없이,/고요하게’에 붙으면 나약한 눈물이 되리라.

영국의 작곡가이며 색소폰 연주자 존 서먼의 곡목에서 딴 제목이다. ‘어른이 되고 싶었다’…. 4월 16일, 오늘의 궂은 날씨만큼이나 마음이 안 좋다. 이만 줄여야겠다.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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