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현 셰프의 비밀노트]<23>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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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년 4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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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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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현 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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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녔던 요리학교 탕트 마리는 런던 남쪽 서리 주의 워킹이라는 소도시에 있다. 아침저녁으로 새가 지저귀던 그곳에서 내가 세 들어 살던 집 주인 로베르토도 새가 아침저녁으로 울어대듯 날이면 날마다 피자를 먹어댔다.

나폴리가 고향인 로베르토를 처음 만난 날, 그가 나에게 했던 말은 “주방기구는 다 써도 좋아. 근데 이거 두 개는 손도 대지 마”였다. 그 두 개란 피자용 오븐과 반죽기였다. 참내, 싶었지만 고개만 끄덕였다. 기구라고 해야 뭐 그리 대단해 보이지도 않았다. 반죽기야 흔히 보던 것이고, 피자용 오븐은 홈쇼핑에서 파는 양면 프라이팬 모양새였다.

피자만 해도 그렇다. 말이 거창해서 피자지, 할 게 뭐 있는가 싶었다. 기계에 밀가루와 물 등을 넣어 반죽을 만들고 그 위에 토마토 페이스트나 치즈 등을 올려 간단하게 구워내는 거 말고 뭐가 더 있나. 그러나 아니었다. 한국 피자 체인점에서 먹던 두껍고 뚱뚱한 피자와는 맛이 아예 달랐다. 순수하다고 해야 할까. 단정했고 조화로웠다. 토핑을 많이, 가득 올린다고 좋은 게 아니란 걸 그제야 알았다.

피자의 핵심은 토핑이 아니다. 도(dough)다. 피자는 기본적으로 빵이기 때문이다. 도에는 ‘00 Flour(밀가루)’를 써야 제 맛이 난다. ‘00’란 매우 곱게 밀가루를 빻았다는 뜻이다(00의 반대편에는 ‘2’가 있다. 입자가 훨씬 굵다). 이 밀가루는 이탈리아 듀럼밀로 만드는데, 글루텐이 많지만(11∼12%) 강력분과 달리 쫄깃하지 않고 단단하게 부서지는 성질이 있다. 피자를 만들어 놨을 때 씹으면 바삭거리지만 떡처럼 쫀득거리지는 않는다.

나머지 재료는 기본적으로 빵과 같다. 물과 소금, 이스트. 레시피에 따라 꿀이나 설탕, 올리브유를 넣기도 한다. 반죽을 마치면 상온에서 반죽이 두 배로 부풀 때까지 발효시킨 뒤 얇게 펴면 도 준비는 끝난다. 이제 그림 그리듯 토핑을 올리면 된다. 이때 주의할 점이 있다. 색을 너무 많이 쓰면 그림이 지저분해지듯 토핑도 산만하면 안 된다. 좋은 재료로 깔끔하게 조합하는 것이 정통 이탈리아 피자다. 토마토 페이스트나 바질 페스토 같은 소스로 밑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취향에 따라 치즈나 햄 따위를 올린다. 모차렐라 치즈는 언제나 탁월한 선택이고 베이컨 안초비 바질 로즈마리 뭐든 좋다.

그 후엔 구울 차례인데, 이게 어렵다. 로베르토가 피자용 오븐까지 가지고서도 ‘나폴리의 맛이 안 난다’며 고향을 그리워했던 건 화덕이 없어서였다. 맛의 차이는 온도 때문이다. 가스 오븐은 기껏해야 250도가 최고 온도지만 화덕에서는 가볍게 300도를 넘겨 400∼500도까지도 올라간다. 이 덕분에 피자 굽는 데 3분이면 족하다.

피자가 준비되면 음료수는 뭐로 할까. 콜라? 아니다. 절대 아니다. 콜라에 들어있는 카페인과 타닌이 혀를 마비시키기 때문에 음식의 맛을 느낄 수가 없다. 피자에는 술이 좋다. 가볍고 상큼한 이탈리아 맥주나 와인이면 최고다. 피자를 만드는 듀럼밀과 이탈리아 맥주에서는 비슷한 향이 난다. 마치 고향 친구들이 오랜만에 만나 함께 사투리를 쓰는 것 같다. 그러나 로베르토와 나는 그런 친구가 아니었다. 한낱 어둡고 침침한 나라의 가진 것 없는 비루한 이방인일 따름이었다. 몇 개월을 함께 산 후 나와 그는 얼마 안 되는 돈 문제로 크게 싸웠고 나는 그 집을 나오게 됐다.

그 후 화덕에서 피자를 굽고, 한 조각에 1달러 하는 피자를 퇴근길에 씹어 먹으며, 특히 두껍고 덜 그을려 맛이 민숭민숭한 ‘비정통’ 피자를 볼 때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외로이 살고 있을 로베르토가 떠올라 먹는 것을 멈추곤 했다. 우리가 웃으며 헤어졌다면 피자를 바라볼 때마다 유쾌한 기분이 들었을 텐데 쉬이 사라지지 않는 아쉬움에 나는 아직도 본토 피자 타령을 한다.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필자(33)는 영국 고든 램지 요리학교 ‘탕트 마리’에서 유학하고 호주 멜버른 크라운 호텔 등에서 요리사로 일했다.

정동현 셰프
#피자#나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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