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홍색 하드커버를 옆으로 펼치고 나서는 책을 시계방향으로 90도 돌려야 한다. 실로 묶어 깔끔하게 제본한 종이 두 뭉치가 눈앞에 나란히 놓인다. 쌍여닫이문을 열어젖히듯 마분지 속표지를 양쪽으로 넘긴다.
왼쪽 묶음에서 하나하나 드러나는 건 인체 해부도 뺨치도록 세밀하게 그려낸 기기묘묘한 펜화 120점이다. 오른쪽 묶음에는 책을 위해 추려낸 그림을 보면서 저자가 새로 쓴 메모를 한국어와 영어로 인쇄했다.
양쪽 페이지를 계속 동시에 넘기면서 읽어나갈지, 그림만 죽 보다가 궁금한 글을 뒤적여 읽을지, 글부터 훑다가 눈길 잡는 구절에 멈춰 자신이 상상한 이미지와 작가의 그림을 비교해 볼지, 독자의 자유다.
저자인 건축가 문훈(46)은 6월 7일∼11월 23일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열리는 건축비엔날레 한국관에서 펜화 40점을 선보인다. 이 책엔 거기서 전시할 그림 25점이 포함됐다. 몇 쪽만 살피면 곧 ‘범상한 공간을 추구하는 건축가가 아니겠구나’ 짐작이 든다. 2009년 작인 강원 정선군의 펜션 ‘락있수다’는 커다란 황소 뿔을 달아 흥미로운 논쟁을 일으켰다. 2005년 한국건축가협회상을 받은 서울 마포구 ‘상상사진관’은 홍익대 앞 공간의 경박한 흐름을 한 박자 묶어 잡아주는 세련된 무게중심이다.
건물 그림은 3분의 2 정도다. 어느 별엔가 주차해놓은 듯한 우주선 단면도, 제주도 여행 플로차트, 행복했던 점심 한 상의 상세도…. 건축이 그저 ‘집 짓는 일’만이 아님을 보여주는, 빼곡한 삶의 기록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