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병무 시인 “백수의 허망함 달래던 어느날 잊혀졌던 詩가 갑자기 쏟아져”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월 15일 03시 00분


코멘트

13년 만에 두 번째 시집 ‘고단’ 펴낸 윤병무 시인
조급하게 낸 첫시집의 후유증… 오랜동안 절필하고 밥벌이만
담담하게 그리는 일상의 소묘… 생활속에 담긴 진실-진심 추구

13년 만에 두 번째 시집을 낸 윤병무 시인. 시인은 “이번 시집은 혼자 먹는 밥 같은 것”이라면서 “나는 보여주고자 하는 욕망보다는 일상 속에서의 소소한 발견이 더 기쁜 사람”이라고 말했다. 고양=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13년 만에 두 번째 시집을 낸 윤병무 시인. 시인은 “이번 시집은 혼자 먹는 밥 같은 것”이라면서 “나는 보여주고자 하는 욕망보다는 일상 속에서의 소소한 발견이 더 기쁜 사람”이라고 말했다. 고양=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 사표를 낸 중년 가장의 어금니에서/땅끝마을산 마늘종장아찌는/못 이기는 척 꼬리를 내려주고 (‘마늘종장아찌’)

불고기 전골에 금세 비워지는/아이들의 밥그릇을 보면서/떳떳한 가장은 만면에 웃음을 띤다 (‘불고기 전골’). 》

윤병무 시인(48)은 일상의 애잔한 서정을 가닥 지어 시를 짠다. 시인 스스로 ‘직무유기’라고 할 정도로 그 손놀림은 더디다. 1995년 등단한 그가 이제야 두 번째 시집 ‘고단’(문학과지성사)을 최근 내놨다. 첫 시집 ‘5분의 추억’ 이후 13년 만이다.

시인은 문학과지성사 편집부 출신이다. 이후 서강대출판부에서 일하다가 지인들과 출판사를 차려 사회생물학 관련 책을 주로 냈다. 그러다 ‘성실하게 일은 하지만 경영을 잘하는 사람은 못되는구나’ 싶어 그만뒀다. 그 뒤로 대학 출판부의 학술 총서 외주 일을 했는데 지난해 봄, 그 일마저 딱 끊기고 말았다.

“계속 일을 하다가 아무 할 일이 없으니 허망했어요. ‘이제 뭐하지…’ 했는데 그동안 잊고 있던 시를 자연스럽게 쓰게 됐어요. 작년 4월부터 6월까지 40여 편을 썼더라고요. 이 두 달 동안 써낸 시를 중심으로 새 시집을 묶어냈습니다.”

지난해 봄은 10년 넘게 밀쳐둔, 먼지 쌓인 상자를 열어젖힌 시간이었다. 촉망받는 신예였던 그가 시를 밀쳐낸 것은 첫 시집 때문이었다.

“첫 시집을 너무 급하게 냈어요. 당시 문예지에 어떤 시인이 등단했는데, 시상이 나와 비슷했어요. 자칫하면 아류가 될 것 같아 마음이 조급했죠. 시집이 나온 뒤에 후회했어요. 절반은 다 버려야겠더라고요. 이것저것 뒤섞인 지저분한 밥상 같았어요. 이후에 시를 잘 못 쓰게 됐어요.”

살뜰한 네 식구의 가장으로서 살아온 인생, 그의 두 어깨를 누르는 고단하고 비루한 삶의 무게는 백수가 된 어느 날부터 시에 실렸다. 그는 ‘이만한 일로 갑자기/설사처럼 시가 마구 써지다니’(‘시작(詩作)’ 중)라고 털어놓는다.

그의 시는 일상을 담담하게 그린 소묘 같다. 상복 같은 빨래, 빨랫비누 쪼가리 같은 눈곱, 손가락질하는 경적, 아스팔트 뚫고 올라온 죽순 같은 자존심, 끝내 벗겨지지 않는 눅눅한 땅콩 같은 인생….

“나를 시인으로 만들어주는 건 아침의 눈곱이에요. 눈곱은 눈물의 찌꺼기, 나는 간밤에 자면서 눈물을 흘렸구나. 그런 일상의 발견, 생활의 흔적들이 나로 하여금 시를 쓰게 만들어요. 늘 그 속에 담긴 진실과 진심을 찾아 헤맵니다.”

함성호 시인은 윤병무의 시에 우리 시사(詩史)에서 간과되는 생활의 서정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거기에는 생활하는 자의 슬픔이 아니라 생활이라는 삶 자체의 슬픔이 있다고.

‘아내가 제 손 잡고 잠든 날이었습니다/고단했던가 봅니다/곧바로 아내의 손에서 힘이 풀렸습니다//훗날에는 함부로 사는 제가 아내보다 먼저/세상의 손 놓겠지만/힘 풀리는 손 느끼고 나니 그야말로/별세(別世)라는 게 이렇겠구나 싶었습니다//그날 오면 아내의 손 받치고 있던/그날 밤의 저처럼 아내도 잠시 제 손 받치고 있다가/제 체온에 겨울 오기 전에/내려놓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고는//아내 따라 잠든 제 코 고는 소리 서로 못 듣듯/세상에 남은 식구들이/조금만 고단하면 좋겠습니다’(‘고단(孤單)’)

고양=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