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시인이 부친 생전에 ‘마더 테레사, 넘치는 사랑’ 일본어판을 번역할 때 썼던 공책을 펼쳐 보이고있다. 아들을 위해 한 자 한 자 공들여 쓴 글자들로 빼곡하다. 박경모 전문기자 kyungmoda@donga.com
“당시 87세였던 아버지는 한쪽 눈을 실명해 책을 읽기 어려우셨어요. 그래도 식사나 산책 때를 빼면 돋보기를 쓰고 번역에 몰두하셨어요. 이 책이 돌아가시기 전 아버지가 아들인 제게 주시고 간 선물 아닐까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테레사 수녀 시복(諡福·교황이 거룩한 삶을 살았거나 순교한 이에게 복자 칭호를 허가하는 선언) 10주년을 맞아 부친인 고 정창현 씨가 번역한 책 ‘마더 테레사, 넘치는 사랑’(해냄) 증보판을 6년 만에 최근 출간한 정호승 시인(63)의 말이다.
이 책은 일본의 보도사진작가가 인도 콜카타에서 빈민과 함께하는 테레사 수녀의 삶을 기록한 글과 사진으로 구성돼 있다. 원래 정 시인이 2006년 한일 시 심포지엄 참석차 일본을 방문했을 때 선물로 받은 일어판 책이었다.
“벌써 17년 전 일이죠. 동아일보 1면 기사에 87세 생일을 맞은 테레사 수녀의 웃는 사진을 보고 ‘마더 테레사 수녀의 미소’라는 시를 지은 적이 있습니다. 이런 (10년 전) 사연을 들은 일본의 한 문인이 친한 친구가 쓴 책이라며 책을 선물해 줬지요.”
하지만 일어를 모르는 시인이 이 책을 읽을 방법이 없었다. 책 내용이 몹시 궁금했던 시인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일어에 능통했던 아버지에게 빈 공책을 드리고 번역을 부탁했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책의 내용을 한 자 한 자 정자체로 한국어로 옮기기 시작했다. 번역에 걸린 시간만 꼬박 7개월이다. 예상했던 것보다 분량이 만만치 않아 금세 공책 한 권을 채웠고, 다시 두꺼운 공책 한 권이 추가로 필요했다.
“번역을 마치시고는 아버지께서 뇌경색으로 쓰러지셨어요. 제가 부탁한 번역일 때문인 것 같아 몹시 죄스러웠죠. 그런데 테레사 수녀님의 책을 한국어로 옮기느라 혼신의 힘을 다한 것을 하느님께서 어여삐 여기신 덕분일까요? 석 달 만에 부축을 받고 산책하실 정도로 기적처럼 회복되셨지요.”
애틋한 부정이 느껴지는 번역본 노트를 읽어 가던 시인은 ‘나 혼자가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이 읽어도 좋겠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렇게 나온 책이 2007년 출간된 ‘마더 테레사의 삶 그리고 신념’(예담)이었다.
테레사 수녀 시복 10주년에 맞춰 시인이 직접 문장을 손보고 사진도 추가해 일본어판 원제목대로 개정판을 내는 작업이 한창이던 올해 8월 아버지는 94세로 세상을 떴다. “아버지께 당신이 번역한 책이 다시 출간되는 기쁨을 드리고 싶었는데 아쉽습니다. 하지만 아버님 영전에라도 이 책을 드릴 수 있어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아버님도 아마 흐뭇해하실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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