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시계, 궁극의 문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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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5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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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과 예술의 끝자락, 바젤월드를 들여다보다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축제 ‘바젤월드’는 주얼리 시계 업체들이 브랜드의 정통성과 기술력을 마음껏 뽐내는 장이다. 올해도 성능과 기술 혁신에 대한 과감한 투자를 보여주기 위해 각 브랜드들은 첨단 기능의 신제품들을 앞다퉈 선보였다. 조난시 구조 신호를 보낼 수 있게 설계된 브라이틀링의 ‘이머전시II’. 브라이틀링 제공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축제 ‘바젤월드’는 주얼리 시계 업체들이 브랜드의 정통성과 기술력을 마음껏 뽐내는 장이다. 올해도 성능과 기술 혁신에 대한 과감한 투자를 보여주기 위해 각 브랜드들은 첨단 기능의 신제품들을 앞다퉈 선보였다. 조난시 구조 신호를 보낼 수 있게 설계된 브라이틀링의 ‘이머전시II’. 브라이틀링 제공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화이트 미니 원피스에 은색 스팽글 베레모를 앙증맞게 눌러 쓴 늘씬한 금발 미녀들이었다.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소식지를 나눠주거나 관람객들을 맞이하는 비현실적인 외모의 도우미들은 각 부스의 현란한 조명, 압도적인 규모 등과 더해져 박람회장에 들어서자마자 화려한 축제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2일 막을 내린 세계 최대의 시계 주얼리 박람회 ‘2013년 바젤월드’ 이야기다.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박람회라고 불릴 만큼 값비싼 최신 시계와 보석들을 선보이는 자리인 바젤월드는 예년보다 한층 호화스러워졌다. 올해 처음으로 배치돼 관람객들을 즐겁게 한 요정 같은 옷차림의 미녀 도우미들뿐 아니라 총 4억5400만 달러(약 5400억 원)를 들여 외관도 모던하게 손을 봤고 브랜드별 부스 디자인에는 유명 건축가들이 대거 참여했다. 열대어로 가득 찬 브라이틀링의 대형 수족관과 자연 친화적으로 꾸며진 에르메스 부스, 고급 대리석과 화려한 조명으로 시선을 사로잡은 제니스나 불가리 매장 등이 그 예다.

바젤월드가 이처럼 화려해진 이유는 역설적으로 불황과 연관이 깊다. 고가 브랜드를 구입할 때 예전보다 신중하게 선택하는 소비자들이 늘어나면서 해외 명품 업체들 역시 브랜드의 히스토리와 진정성, 프리미엄 이미지를 강화하는 것이 훨씬 중요해진 것이다.

그런 만큼 올해는 각 브랜드가 보유한 첨단 기술력을 과시하는 독특하면서도 희귀한 콘셉트의 제품이 잇따라 등장해 눈을 즐겁게 했다. 신기술을 입힌 복고풍의 클래식 모델들도 계속 강세를 보였다. 바젤에 등장한 주요 트렌드를 키워드별로 정리했다.

박람회장 메인홀에 자리잡은 위블로 부스 전경. 위블로 제공
박람회장 메인홀에 자리잡은 위블로 부스 전경. 위블로 제공
▼ ‘카레라…’ 오차제로 넘보고 ‘이머전시’ 조난추적 킹으로


지금까지 없던 기술력


바젤월드의 중요한 볼거리 중 하나는 각 브랜드의 최첨단 성능을 갖춘 신제품이다. 수년의 연구 끝에 탄생한 희귀한 기능의 시계들은 각 브랜드가 성능에 얼마나 과감하게 투자하는지를 보여주는 척도다. ‘브라이틀링 이머전시Ⅱ’는 1995년 기발한 아이디어에서 처음 탄생했다. 손목시계에 송신기를 탑재해 조난 시에 정확한 위치 추적과 구조 신호 요청이 가능하게 해보자는 생각이 그것이다. 출시 당시 항공우주산업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이머전시’는 올해 한 단계 진일보해 다시 출시됐다. 현존하는 위치탐사 장치 중 유일하게 기존 아날로그 주파수뿐 아니라 디지털 주파수까지 송신 가능한 두 개의 초소형 안테나를 갖춘 것이 특징이다. 조난자의 추적과 구조 활동이 성공할 확률이 그만큼 높아진 것이다.

해리윈스턴의 ‘오퍼스13([1])’은 외부의 독립 시계 제작자와 손잡고 선보인 독특한 구조의 제품이다. 기존의 시계와는 다이얼(시계판) 구성이 완전히 다르다. 시간을 읽으려면 시계의 독특한 작동법을 먼저 익혀야 하는데, 무척 드라마틱하다. 우선 분침 대신 59개의 스틸 화살대, 시침 대신 11개의 회전 트라이앵글이 있다. 시계 트랙을 따라 59개의 스틸 화살대가 1분마다 도미노처럼 차례대로 쓰러지고 5분마다 빨간색으로 표시된다. 중앙 돔에 내장된 실버트라이앵글은 60분이 지나면 회전하면서 꼭짓점 부분으로 시간을 가리킨다. 오전, 오후 12시에는 마술쇼처럼 다각형 돔에 브랜드 로고가 6분 동안 나타났다 사라지도록 설계했다. 스틸 화살대에는 총 242개의 보석을 썼다. 가격은 4억 원대.

태그호이어는 세계 최초로 헤어스프링(기계식 시계의 부품으로 속도 조정 역할을 하지만 중력, 온도의 영향을 받아 시계 정확도를 떨어뜨린다)을 자성을 가진 부품으로 대체해 오차 가능성을 혁신적으로 줄인 ‘카레라 마이크로펜둘럼 투르비용 S’를 선보였다.

궁극의 화려함

‘더 화려하게, 더 클래식하게!’ 올해 바젤월드의 트렌드를 잘 보여주는 위블로의 ‘클래식 퓨전 오트 조아이에 투르비용 스켈레톤’. 시계의 정교함과 클래식함을 살리면서도 곳곳에 1000개가 넘는 다이아몬드를 빼곡히 박아넣어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위블로 제공
‘더 화려하게, 더 클래식하게!’ 올해 바젤월드의 트렌드를 잘 보여주는 위블로의 ‘클래식 퓨전 오트 조아이에 투르비용 스켈레톤’. 시계의 정교함과 클래식함을 살리면서도 곳곳에 1000개가 넘는 다이아몬드를 빼곡히 박아넣어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위블로 제공
소수의 ‘슈퍼리치’를 위해 막대한 시간과 비용을 들여 탄생시킨 화려한 제품들은 감상하는 것만으로 감탄을 자아낸다. 위블로의 ‘클래식 퓨전 오트 조아이에 투르비용 스켈레톤([2])’은 바게트 컷 다이아몬드(총 17.39캐럿)가 베젤, 케이스 중앙, 크라운 등 곳곳에 빽빽하게 장식돼 강렬한 비주얼 충격을 주는 제품이다. 시계 움직임의 아름다움과 정교함을 관찰할 수 있도록 오픈워크 다이얼(시계판이 투명해 시계가 작동되는 과정을 볼 수 있음)로 구성돼 있다. 다이아몬드는 러시아 야쿠츠크에서 특별 공수된 것으로 총 1185개에 달한다. 다이아몬드 공정에만 1800시간이 넘게 들었다. 8개만 한정 생산됐으며 가격은 6억 원대.

해리윈스턴의 ‘글라시에([3])’는 여성들을 겨냥한 눈부신 제품이다. ‘다이아몬드의 왕’이라는 명성을 가진 브랜드의 정통성을 살려 바게트 컷 다이아만으로 우아하면서도 부드럽게 구부려지는 다이아몬드 워치를 선보였다. 총 422개의 다이아몬드가 쓰였으며 유연한 곡선 형태의 브레이슬릿(손목을 감싸는 부분) 설계를 위해 디자이너, 보석 세공사, 보석 세팅가가 4개월 동안 머리를 싸맸다. 총 76.4캐럿의 다이아몬드 세팅에는 1000시간이 걸렸다. 가격은 29억 원대.

보석을 사용한 화려한 시계가 늘어난 것은 골드나 다이아몬드 등을 좋아하는 중국인 등 아시아 시장의 영향력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태그호이어의 ‘뉴 아쿠아레이서 레이디([4])’는 18K 로즈골드와 스틸을 함께 써 한층 고급스럽고 화려해졌다. 총 47개의 다이아몬드가 화려하게 세팅돼 여성스러움을 강조했다.

롤렉스는 올해 베스트셀러인 ‘데이 데이트’ 시계의 테두리와 숫자 등에 다이아몬드를 세팅한 ‘오이스터 퍼페추얼 데이 데이트’(9000만 원대)를 선보였다. 금으로 만든 여성용 제품은 화려한 연꽃 모양을 넣었고 시곗줄에는 다이아몬드를 입혔다. 가격은 1억 원대. 바젤월드에 참가한 유일한 국내 브랜드 ‘로만손’은 김연아 선수를 모티브로 만든 ‘그레이스 온 아이스’ 모델을 전면에 내세웠다. 450개 한정판으로 출시됐으며 자개 소재로 문자판을 만들었다.
올해 바젤월드는 부스 경쟁도 치열했다. 메인홀 입구에 자리잡은 태그호이어는 대표 컬렉션인 ‘카레라’ 50주년을 기념해 첨단과 혁신, 절제미를 테마로 꾸며졌다. 새 부스 앞에는 멕라렌과의 파트너십을 기념해 ‘12c GT 로드 레이서 카’가 전시돼 눈길을 사로잡았다. 태그호이어 제공
올해 바젤월드는 부스 경쟁도 치열했다. 메인홀 입구에 자리잡은 태그호이어는 대표 컬렉션인 ‘카레라’ 50주년을 기념해 첨단과 혁신, 절제미를 테마로 꾸며졌다. 새 부스 앞에는 멕라렌과의 파트너십을 기념해 ‘12c GT 로드 레이서 카’가 전시돼 눈길을 사로잡았다. 태그호이어 제공
▼ 다이아 촘촘한 시계들 클래식 전통에 빛나다 ▼


클래식과 컬래버레이션

‘더 클래식하게(More classic)’는 올해 바젤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다. 신기술을 입히고 화려한 컬러, 장식으로 변형을 줘도 복고적이면서 클래식한 기본 외형은 그대로 유지해 브랜드의 전통성을 강조했다. 태그호이어의 경우 올해 대표 컬렉션인 ‘카레라’ 50주년을 맞아 남성적 스포티함에 우아함을 더한 ‘카레라 칼리버 36 크로노그래프 플라이백([5])’을 내놨다. 다이얼은 빈티지 스톱워치에서 영감을 받아 디자인했으며 케이스백은 사파이어 크리스털로 제작됐다. 시간당 3만6000번 진동하는 ‘칼리버36’ 무브먼트를 썼으며 한 번의 간단한 버튼 조작으로 크로노그래프를 빠르게 리셋하는 플라이백 기능(스톱 과정을 거치지 않고 스타트, 리셋이 즉각 가능)이 추가된 게 특징이다. 900만 원대.

‘남자들의 유일한 액세서리’라고 일컬어지는 시계는 역시나 남자들이 좋아하는 자동차나 항공기 등과의 유대관계가 밀접하다. 아무리 고가로 출시돼도 마니아의 열광도가 높다. 브라이틀링은 벤틀리와의 컬래버레이션 10주년을 맞아 디자인에서도 벤틀리의 상징적 외관을 차용한 ‘브라이틀링 포 벤틀리 컬렉션([6])’을 선보였다. 벤틀리 차량의 휠 테두리를 연상시키는 투명한 백케이스로 자동 추를 감상할 수 있도록 했으며 벤틀리 특유의 라디에이터 그릴 모티브에서 영감을 받은 디자인으로 베젤(다이얼 윗부분에 부착한 크리스털을 단단히 감싸는 가장자리 부분)을 입체적으로 장식했다.


항공시계로서의 내력을 오랫동안 쌓아온 제니스는 비행역사를 함께 해온 파일럿 라인을 강화해 최초 파일럿 워치 모습을 그대로 본떠 디자인한 ‘몬트레 디에로네프 타입20’ 컬렉션 5종을 선보였다. 이 중 ‘애뉴얼 캘린더 워치([7])’는 제니스 자체 제작 무브먼트인 ‘엘 프리메로’를 탑재했으며 1년에 한 번만 조정하면 되는 ‘애뉴얼 캘린더’ 기능을 갖췄다. 티타늄과 로즈골드로 이뤄진 투톤 버전과 스틸 버전 두 가지로 출시됐다.

▼ MB&F 브랜드 시선 집중 ▼

우주선 부엉이 개구리눈 시계 세상… 꿈-상상력-파격이 절묘하게 만났다

기발한 상상력에서 출발한 독특한 시계들을 선보이는 MB&F. 올해 신제품으로 출시한 ‘메가윈드’는 개구리 모양을 닮았다. MB&F 제공
기발한 상상력에서 출발한 독특한 시계들을 선보이는 MB&F. 올해 신제품으로 출시한 ‘메가윈드’는 개구리 모양을 닮았다. MB&F 제공
다이얼이 개구리눈처럼 볼록하게 튀어나온 손목시계, 혹은 우주선과 부엉이처럼 생긴 시계가 있다?

지금껏 시계 디자인에선 볼 수 없었던 파격적이면서도 개성 넘치는 제품을 선보이는 한 실험적인 시계 제조회사가 2013년 바젤월드에서 내놓아 시선을 사로잡았다. MB&F라는 브랜드다.

창업자인 막스 밀리언 뷰저의 이름을 딴 ‘MB’란 약자에 친구들(Friends)이란 의미로 F를 더한 특이한 브랜드명만큼이나 회사 운영방식도 독특하다. 전체 사원은 각 분야에서 필요한 최소 인력인 14명만으로 구성돼 있고 생산에 필요한 다른 인력은 외부의 전문가인 ‘친구들’과 협업해서 일을 진행한다.

뷰저 창업자는 원래 예거 르쿨트르, 해리 윈스턴 등 세계적인 시계 브랜드의 브랜드 매니저로 일하며 업계에 영향력을 과시하던 인물이었지만 2005년 ‘어릴 때 상상했던 대로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원하는 시계를 만들고 싶다’며 회사를 그만두고 전 재산을 털어서 MB&F를 창업했다.

그 꿈대로 탄생한 것들이 우주선, 비행기, 스포츠카, 개구리의 형상을 한 독특한 시계들이다. 커뮤니케이션팀 헤드인 샤리스 야디가로글로 씨는 “일단 어떤 기술적 고려도 없이 어릴 적 꿈, 만들고 싶은 아이디어를 내놓은 뒤 차후에 이것을 어떻게 디자인화하고 무브먼트를 탑재할 것인지 연구하는 순서에 따라 제품이 생산된다”며 “우리 회사는 시장 조사 같은 것은 전혀 하지 않고 고객 반응도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마켓 리서치를 한다면 이런 희귀한 제품의 생산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잘 팔리는 스테디셀러에서 컬러나 다이얼 모양만 조금씩 바꾼 신모델을 내고 가격을 높이는 기존 브랜드들과 달리 매년 완전히 다른 콘셉트의 새로운 시계를 출시하는 것도 자랑거리다.

다행히도 아직까지는 이런 독특한 시계를 원하는 니치 마켓이 존재한다. 수백 개로 한정 생산되는 제품들은 지금까지는 세계 각지로 원활히 판매되고 있다. 제품 가격은 한 점에 4000만 원에서 3억∼4억 원대까지 다양하다. 야디가로글로 씨는 “꿈에서 출발해 만들어지는 시계인 만큼 제약 없는 상상력의 실현에 충실하려 한다”며 “회사가 유명해져도 여기서 인원을 더 늘리지 않을 예정”이라고 말했다.

바젤=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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