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김수영(1921∼1968)은 1950년대 초 신혼시절 아내에게 이렇게 말한다. 시인은 번역 일을 했고, 아내는 삯바느질로 하루하루 생계를 이어가던 시절이었다. 가난이 아이를 포기하자는 말로 나온 것이다. 형편이 더 어려워지자 아내는 재봉틀과 금가락지마저 팔았다. 그러던 어느 날 김수영은 아내에게 외설적인 소설 한 편을 써보라고 권한다. 필명으로. 아내가 쓴 원고를 들고나간 시인은 받은 원고료를 모두 쓰고 만취해 들어온다. 그러곤 말한다. “그 따위 소설을 쓰게 해서 미안해.”
시인의 아내인 김현경 씨(86)가 남편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뜬 지 45년 만에 털어놓는 첫 회고록. 평생 현실보다는 시(詩)라는 이상향을 쳐다보며 고독한 싸움을 이어간 김수영의 슬픈 얼굴이 가득하다. 병약한 소년이었던 김수영은 치질과 위산과다, 대장염을 앓았고 기관지염은 달고 살았단다. ‘기침을 하자/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시 ‘눈’에서)를 읽으면 겨울밤 쿨룩거리던 시인의 기침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는 아내. 시인과 20여 년을 함께 산 아내의 기억을 통해 ‘인간 김수영’을 만날 수 있는 책. 반갑고도 애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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