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성 전문기자의 &joy]메밀꽃 필 무렵… 구름 속 배추들도 아삭아삭 익어간다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8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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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석문학 100리길’ 봉평∼평창을 걷다

‘구름 위의 배추밭’ 안반데기. 강원 평창과 강릉 사이 해발 1100m 고지에 푸른 바다처럼 펼쳐져 있다. 배추 살이 통통하게 올랐다. 푸른 잎사귀의 기운이 성성하다. 이제 곧 수확할 때다. 가을이다. 바람이 서늘하다. 물안개가 스멀스멀 밑도 끝도 없이 떠돈다. ‘아, 그러나 시방 우리는/각각 홀로 있다./홀로 있다는 것은/멀리서 혼자 바라만 본다는 것/허공을 지키는 빈 가지처럼...//가을은/멀리 있는 것이 아름다운/계절이다.’(오세영의 ‘가을에’에서). 배추밭둑엔 보랏빛 쑥부쟁이가 지천이다. 노란 달맞이꽃이 건들거리며 떼로 서 있다. 푸른 달개비꽃이 요염하다. 저 멀리 산등성이 위엔 하얀 양떼구름이 아득하다. 평창=서영수 전문 기자 kuki@donga.com
‘구름 위의 배추밭’ 안반데기. 강원 평창과 강릉 사이 해발 1100m 고지에 푸른 바다처럼 펼쳐져 있다. 배추 살이 통통하게 올랐다. 푸른 잎사귀의 기운이 성성하다. 이제 곧 수확할 때다. 가을이다. 바람이 서늘하다. 물안개가 스멀스멀 밑도 끝도 없이 떠돈다. ‘아, 그러나 시방 우리는/각각 홀로 있다./홀로 있다는 것은/멀리서 혼자 바라만 본다는 것/허공을 지키는 빈 가지처럼...//가을은/멀리 있는 것이 아름다운/계절이다.’(오세영의 ‘가을에’에서). 배추밭둑엔 보랏빛 쑥부쟁이가 지천이다. 노란 달맞이꽃이 건들거리며 떼로 서 있다. 푸른 달개비꽃이 요염하다. 저 멀리 산등성이 위엔 하얀 양떼구름이 아득하다. 평창=서영수 전문 기자 kuki@donga.com
《‘이지러는 졌으나 보름을 갓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뭇이 흘리고 있었다. 대화까지는 팔십 리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이효석(1907∼1942)의 ‘메밀꽃 필 무렵’에서
하얀 메밀꽃이 하나둘 피고 있는 평창 봉평 산자락.
하얀 메밀꽃이 하나둘 피고 있는 평창 봉평 산자락.
하얀 메밀꽃이 피었다. 산허리의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힌다. 메밀의 붉은 대궁이 이슬에 젖어 항라 적삼처럼 아슴아슴하다. 메밀꽃은 아직 일러 자잘하다. 우우우 떼로 피려면 열흘쯤 더 있어야 한다. 그래도 제법 풋풋한 향기가 알싸하다.

강원 평창 봉평에 가을이 왔다.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선선하다. 살갗에 ‘연한 소름’이 돋는다. 매미소리가 잦아들면서 “찌르르∼” 여치 울음소리가 저릿하다. 산허리엔 드문드문 싸락눈이 온 듯 희끗희끗하다. 껑충 큰 노란 마타리꽃이 불쑥불쑥 고개를 주억거린다. 건들건들 억새가 바람에 흔들린다. 햐얀 개망초꽃과 노란 달맞이꽃이 지천으로 깔깔댄다. 물봉선이 오종종 모여 수줍게 고개를 숙이고 있다. 보랏빛 쑥부쟁이는 이미 기세등등하게 활짝 피었다.

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서, 장돌뱅이 허생원은 봉평 흥정천을 따라 밤길을 걸었다. 흥정천 물은 차고 맑다. 쫄쫄! 물소리가 아늑하다. 같은 또래 조선달과 아들뻘인 동이는 말이 없다. 보름을 갓 지난 달빛은 우윳빛처럼 부드럽게 흠뻑 쏟아져 내린다. “딸랑딸랑!” 발에 밟히는 늙은 나귀의 방울소리가 애잔하다. 봉평에서 장평을 거쳐 대화까지는 무려 팔십 리(32km) 길. 지금은 곧게 펴진 아스팔트길로 15km에 불과하지만, 강과 산을 끼고 도는 길은 예나 지금이나 구불구불 서두름이 없다.

‘효석문학 100리길’은 봉평에서 평창까지의 49.2km에 이르는 길이다. 모두 5개 코스 중 제1구간(7.8km)만 길이 열렸다. 봉평관광안내센터∼메밀밭∼흥정천교∼강변집 앞길∼백옥포마을∼금당계곡로∼노루목고개∼용평여울목까지 이효석의 체취가 가장 많이 묻어 있는 곳이다. 느릿느릿 걸어도 2시간 30분 정도면 걸을 수 있다. 허생원과 성씨 처녀의 사랑이 깃든 물레방앗간과 흐드러진 메밀꽃밭을 만날 수 있다.

이효석은 봉평에서 태어나 어릴 적 서당에 다녔지만 초등학교는 당시 대처인 평창에서 마쳤다(1914∼1920년). 아마도 평창에서 하숙 생활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일요일이나 방학 땐 장돌뱅이 허생원이 다녔던, 그 길을 따라 평창∼봉평을 오갔을 것이다. 대화는 바로 봉평과 평창 사이에 있다.

메밀은 강인하다.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란다. 건조한 곳에서도 굳건하게 뿌리를 내린다. 갈색 메밀은 작고 세모졌다. 단단하고 서늘하다. 속이 뜨거운 사람에게 안성맞춤이다. 하지만 찬 음식에 약한 사람은 배탈이 날 수 있다. 메밀국수는 들큼 텁텁하다. 오래된 친구처럼 담담하다.

춘천막국수나 평창 봉평 메밀국수나 그게 그거다. 서울에서 ‘국수’라고 하고, 안동에서 ‘국시’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차이라면 국물이 좀 다르다는 것 정도다. 봉평은 동치미에 과일 채소 국물 등을 많이 넣는다.

‘내 마음 지쳐 시들 때/호젓이 찾아가는 메밀꽃밭/슴슴한 눈물도 씻어 내리고/달빛 요염한 정령들이 더운 피의 심장도/말갛게 심어준다.//그냥 형체도 모양도 없이/산비탈에 엎질러져서/둥둥 떠내려 오는 소금밭//아리도록 저린 향내/먼산 처마끝 등불도 쇠소리를 내며/흐르는 소리’
-송수권의 ‘메밀꽃밭’


평창은 여름이 거의 없다. 해발 700m가 넘는 곳이 62.5%나 된다. ‘하늘이 낮아 고개 위가 겨우 석 자’(정도전)라는 말이 실감난다. 평창읍은 평창강이 휘돌아나가는 물돌이 동네다. 마치 평창강이 평창읍내를 으스러지게 껴안고 있는 듯하다. 장암산(836m) 패러글라이딩 활공장에 가면 발아래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푸른 하늘 아래 푸른 산과 푸른 물이 어우러져 ‘아라리∼아라리∼’ 돌고 돌아간다. 뭉게구름 너머 앞산이 첩첩하고 뒷산도 아득하다.

▼고랭지 배추밭 ‘안반데기’… 해발 1100m에 안반처럼 평평한 둔덕이 198만m²▼


강원 산간지역 경작지는 거의 쪼가리 밭이다. 한마디로 ‘높드리’라고 할 수 있다. ‘높드리’는 ‘높은 산꼭대기에 있는 뙈기밭’을 이르는 순수한 우리말. 산허리나 산등성이에 듬성듬성 조각보처럼 놓여 있다. 그 크기도 들판에서처럼 ‘100평 200평…’식으로 세지 않는다. 보통 ‘가리’나 ‘둔(屯)’을 쓴다.

‘가리’는 골짜기 곳곳에 ‘밭갈이할 만한 땅’을 말한다. 가령 ‘아침가리’란 아침햇살이 잠깐 비칠 때 부쳐 먹을 만한 땅이다. 한자로는 ‘朝耕洞(조경동)’이라고 한다. 연가리는 옛날 담배농사(연초)를 많이 했던 밭이다. 적가리는 가을에 단풍이 붉게 드는 곳. 보름가리는 보름은 갈아야 하는 넓은 땅이다. 인제 4가리가 유명하다. 아침가리, 연가리, 적가리(곁가리·방태산휴양림 자리), 명지가리가 바로 그곳이다.

둔(屯)은 사람들이 모여 살 만한 산기슭의 평평한 둔덕을 말한다. 홍천군 내면 쪽에는 3둔이 있다. 살둔(생둔), 월둔, 달둔이 그렇다.

대관령 일대엔 고랭지 배추밭이 유명하다. 해발 1000m가 넘는 고원의 ‘구름 위에 떠있는 배추밭’이다. 원래 자갈만 있던 둔덕을 사람들이 피와 땀으로 일군 곳이다. 아직도 일부 뙈기밭은 소로 밭갈이를 해야 한다. 안반데기, 육백마지기, 귀네미 등 이름도 재밌다. 이 중 안반데기는 해발 1100m의 높은 곳에 198만 m²(약 60만 평)의 너른 배추밭이 장관이다. 1965년 화전민들에게 국유지를 개간하게 한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 현재는 20여 농가가 살고 있다. 고루포기산(1238m) 일대에 남북으로 독수리날개처럼 펼쳐졌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해돋이도 황홀하다.(033-655-5119)

‘안반’은 떡메로 떡을 칠 때 밑에 받치는 안반을 말한다. 땅이 평평해서 붙은 이름이다. ‘데기’는 둔덕의 ‘덕’을 말하는 사투리다. ‘안반처럼 평평한 둔덕’이라는 뜻이다. 안반데기의 행정구역은 강릉시 왕산면에 속하지만 그 너머는 바로 평창군이다. 서울에서 승용차로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갈 때도 평창 쪽으로 가는 게 편리하다. 횡계나들목∼용평리조트 방면∼리조트입구 삼거리에서 도암댐 방면 직진∼도암댐 못 미쳐 왼쪽 고갯길로 가면 된다. 아스팔트길이라 일반 승용차로도 너끈하게 올라갈 수 있다.

육백마지기는 평창 미탄면 청옥산(1256m) 정상 부근에 있다. 말 그대로 육백마지기(약 12만 평)쯤 되는 널찍한 배추밭이다. ‘볍씨 육백 말(斗)을 뿌릴 수 있는 곳’이란 설도 있다. 안반데기보다 돌이 더 많고 오르는 길도 험하다. 이곳도 1960년대 개간했다.

태백 귀네미 마을은 1980년대 삼척댐공사로 발생한 수몰민들이 집단 이주해 일군 땅이다. 65만3000m²(약 19만7000평) 넓이.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의 모습이 ‘소의 귀’를 닮아 ‘귀네미’라고 부른다. 배추밭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보는 동해 해돋이도 소문났다. 이 밖에 함백산 너머 태백 매봉산(1303m) 북쪽 기슭의 고랭지배추밭 132만 m²(약 40만 평)도 빼놓을 수 없다. 하얀 풍력발전기와 푸른 배추밭의 어우러짐이 볼만하다.

배추는 섭씨 20도 이하의 선선한 날씨에 밤낮 기온 차가 커야 맛있다. 고랭지배추가 아삭아삭하고 단 이유다. 고랭지배추는 노란 속잎이 꽉 찬 결구배추다. 1800년대 중반 외국에서 들여온 것이다. 잎이 벌어져 푸른 잎사귀만 있는 것은 토종배추다. 고랭지배추는 5월 중순께 모종을 심어 2개월쯤이면 다 자란다. 8월 말부터 본격적으로 거둬들이기 시작한다. 요즘이 넓은 고랭지 배추밭을 볼 수 있는 끝물 기회인 셈이다.

9월 7일부터 ‘효석 문화제’

봉평의 이효석문학관. 이효석은 이곳에서 ‘장에서 장으로떠도는 장꾼’들을 보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봉평의 이효석문학관. 이효석은 이곳에서 ‘장에서 장으로
떠도는 장꾼’들을 보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평창 봉평 일대에선 해마다 메밀꽃 축제(효석문화제)가 열린다. 봉평은 가산 이효석 선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실제 무대일뿐더러, 가산 선생이 태어난 곳이기 때문이다. 올해는 9월 7일부터 16일까지 10일 동안 펼쳐진다. 이효석문학상 시상을 비롯해 백일장, 시낭송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선보일 예정. 마당극 ‘메밀꽃 필 무렵’과 거리 민속놀이, 국악제도 곁들여진다. 메밀음식이나 봉평 옛 시골장터의 정취도 맛볼 수 있다. 지난해 축제기간 방문객은 35만여 명.

김성기 이효석문학관 관장은 “축제기간 메밀꽃은 피겠지만, 올해 너무 가물어서 메밀 키가 무릎쯤밖에 차지 않을까 걱정이다. 예년처럼 메밀대궁이 허리 위쯤까지 껑충 올라와야 하는데…. 아마 9월 10일쯤 꽃이 가장 좋을 것으로 생각된다. 생가나 문학관 주변보다는 무이예술관 부근의 꽃이 훨씬 나을 것 같다”고 말했다. 033-330-2700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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