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서 양털 깎다가 랩에 눈떴어요”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6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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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낮엔 직장인-밤엔 힙합 뮤지션 임재현 씨의 ‘자기소개서’

임재현 씨는 질풍 같던 10대 시절에 대해 “그땐 어려서인지 두려움보다는 늘 설렘이 더 컸다”고 회고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임재현 씨는 질풍 같던 10대 시절에 대해 “그땐 어려서인지 두려움보다는 늘 설렘이 더 컸다”고 회고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최근 일리제이(Illy J)라는 이름으로 데뷔한 일렉트로닉 힙합 뮤지션 임재현 씨(24)는 음반사 칠리뮤직 코리아 직원이다. 낮에는 정장 차림인 그는 밤이면 번쩍이는 의상의 래퍼로 변신한다. 아이돌그룹 연습생이기도 했던 그는 지난해 10월 음반사에 지원할 때 음악 관련 경력을 숨겼다. 최근 서울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난 그는 솔직한 자기소개서를 다시 쓰고 싶다고 했다.

사장님, 아시다시피 저 임재현입니다. 고졸 검정고시를 통과했지만 학교에 다닌 걸로 치면 중학교 중퇴 정도가 되겠죠.

공부가 싫었습니다. 2001년 중1 때 학교를 그만둔 건 ‘교실에 앉아 있느니 세상을 부딪쳐보자’는 막연한 신념 때문이었죠. 그해 검정고시로 중학교 졸업장을 땄고 이듬해 고교과정을 통과했어요. 부모님을 설득한 건 A4용지 한 장짜리 ‘임재현 10년 대계(大計)’였어요. ‘세계를 방랑하며 언어능력과 경험을 쌓고 돌아와 20대 중반에는 어엿한 직장에 들어간다’는 황금빛 플랜. 부모님은 못 이기는 척 캐나다행 비행기표 값 140만 원과 밴쿠버 한인교회 주소 하나를 쥐여주셨죠.

현지 목사님은 그곳 고교에 절 등록시켜 주셨어요. 꿈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절 챙겨주던 고마운 한국인 누나를 일본인 또래들이 괴롭혔어요. 도전장을 날렸죠. ‘너네 럭비구장으로 나와.’ 한국 학생, 일본 학생 합쳐 40여 명이 벌인 패싸움은 마을 신문기사로 소개됐어요. 학교를 나와야 했죠. 2002년 12월이었어요.

그 무렵 인터넷 채팅으로 ‘조시’란 친구를 알게 됐어요. ‘(뉴질랜드로) 건너오면 우리 집에 재워줄 수 있다’고 하더군요. 2003년 1월 바다를 건넜어요. 뉴질랜드 북섬의 파머스턴노스. 조시의 집에서 그 아버님의 정원사 일을 도우며 살게 됐어요. 어느 날, 신세 지는 게 죄송해 짐 싸서 나와 택시를 탔죠. 들판을 한참 달리는데 미터기 요금이 오버됐고 제일 먼저 나타난 인가에 차를 세웠어요. 백발의 할아버지가 나오시기에 “아이 해브 노 머니. 기브 힘(운전사에게) 더 머니 플리즈”라고 했죠. 할아버지는 마구간 2층 다락에 잠자리를 내주고 목장에서 양털 깎는 일을 하게 해주셨죠. 그때 도시 뒷골목에서 흑인들이 듣던 랩에 심취했어요. 그들과 어울려 어설프게 공연도 시작했죠.

2004년 돌아온 한국에서의 삶은 팍팍했어요. 세차, 웨딩홀 접시닦이, 고철상의 재활용 분류 등등 닥치는 대로 했죠.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와 혼자 컴퓨터로 음악 만들고.

스무살 때 오디션을 봐 예비 아이돌그룹에 래퍼로 들어갔지만 회사 사정으로 데뷔 꿈은 부서졌죠. 2011년 11월, (칠리뮤직) 사장님이 고맙게도 풍운아인 절 채용해주셨어요.

접었던 래퍼의 꿈은 첫 출근날 마법처럼 살아났죠. 지방 스케줄에 운전자로 나선 길, 무심결에 튼 제 데모 CD가 괜찮았던지 사장님이 말하셨죠. “너, 정체가 뭐냐. 데뷔할래?” 낮엔 회사에 충실한다는 조건으로 앨범을 내주기로 하셨고 결국 일리제이가 세상에 나오게 됐어요. 감사합니다. 사장님, 인터뷰 동행도 황송한데 매니저처럼 가방까지 들어주시다니요. 앞으로 잘돼서 수익을 가져다 드릴게요. 가방은 이리 주세요.

임희윤 기자 imi@donga.com
#뉴질랜드#일리제이#임재현#칠리뮤직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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